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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Jul 03. 2022

마지막 협상

 우리가 이혼을 했더라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

딸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니,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까지 딸은 우리 부부의 불화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아이가 성장해 본인 스스로 판단 할 수 있게 되기 전에 내 입으로 먼저 아이 아빠 잘못을 드러내어 반복해 하고 원망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무수한 낮과 밤을 외롭게 견뎌야 했었다. 부모의 갈등으로 어린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어도 딸은 마와 아빠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어느샌가 은연중에 깨달았다. 아이는 집안의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고 신생아 때부터 울음 끝이 길지 않아 순하다 여기며 길렀던 아이가 사춘기 무렵엔 만만찮은 강도로 내게 어려움을 선사했다.


딸이 보기에 아빠는 단순하고 철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 엄마는 가정과 가족들의 모든 것을 챙기며 사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몇 년간은 엄마인 나에게 아빠의 철없음을 참아주길 원했다.  어린 마음에 내게 미안해하면서도 집에 더 이상 불화가 생기는 걸 원치 않는다고 얘기 '엄마가 아빠를 조금만 더 봐주면 안 되겠어?'라고  번 부탁을 했었다. 어차피 말을 해도 듣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도 않는 아빠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딸의 고육지책이었다.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답답하고 참담한 마음이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편의 잘못에 대해 아이에게 모든 걸 다 얘기할 순 없었다.


정말 쓸쓸하고 고단한 세월이었다.

지난 9년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전에도 이미 웬만한 사람들이 겪는 인생의 희로애락은 겪을 만큼 겪으며 살았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겪은 일이 지난 9년 가까이 벌어진 믿기 힘든 일들이었다.

차라리 남편과 끝까지 싸워 속내를 드러내고 이혼한 채 살았더라면 지금처럼 서로 같은 것을 보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이혼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앞으로 달라질 것을 약속하고 또 약속하는 남편을 절대 믿지도 또 그런 남편을 절대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남편의 애원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는 우리 부부 모두 하나뿐인 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 사춘기 지나면서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어도 아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함께 있지만 함께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아빠의 모습은  한창 예민한 아이의 마음을 찢어놓기에도 충분했었다.

아이는 그 이후로 종종 내게 참지 말고 이혼을 하라는 말을 건네곤 했었다. 그렇게 쉽지 않은 세월을 견디고 이끌어 이제야 처음으로 남편의 입에서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당신에게 정말 미안했고 다시는 상처 주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을 듣게 된 것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고 갔지만 내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와 남편이 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부분-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다시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딸이 올바르게 처리했어야 하는 일 대충 얼버무려 놓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내가 사과를 받아 주지 않 도리어 자신이 화를 내는 상적이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생겼다.

평소 남편의 보여주던 모습을 대로 내게 보여 주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웬만해선 내 앞에서 인상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는 딸이지만 가끔 과한 스케줄과 내 병에 대한 관리와 간호, 또 자신의 병으로 인한 체력 저하로 과부하가 걸릴 땐 본인도 가끔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모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한 일이 정당화될 수 없다. 딸을 양육하며 어른에겐 말할 것도 없 상대가 아이 일지라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생기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아무런 사족 없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가르쳤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여주 키웠다.(우리 집에서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상대방이 용서를 해주면 그 후에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도 존중받았다 느낄 수 있고 내게 생긴 사정도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항상 평소에 그렇게 행동하던 아이가 무심결에 변명부터 늘어놓고 내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자 오히려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부모가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절감(切感)했다.


그날 저녁 기도 시간에 딸 다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사과를 받은 뒤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지니아빠. 내가 27년 동안 지니를 바르게 키우려고 온갖 노력 다했는데 당신이 다 망친 거야. 당신이 하는 거 그대로 따라 하잖아. 이러면 지니가 결혼했을 때 결혼 생활이 평안하겠어? 의사소통이 가능하겠어? 당장 싸움부터 되지. 내가 예의범절, 버릇, 사과, 양보, 배려 이런 거 가르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무심결에 그냥 본 대로 따라 하잖아. 직접 눈으로 보니까 어때? 마음에 들어?"

"아! 난 이런 건 생각도 못 해봤어. 정말... 내가 하는 거랑 똑같네... 그동안 당신 속 많이 상했겠다. 생각이 많아지네. 갑자기...."

"우리가 망가진 건 할 수 없다 쳐.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자식까지 불행하게 살도록 만들 순 없잖아."


남편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매일 하던 잔소리보다 딸이 보인 행동 한 번이 damage가 훨씬 커 보였다.

그리고 난 결정타를 한방 더 날렸다.


"그리고 이제 와서 당신이랑 나랑 불타는 사랑 다시 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아픈데 지금 이혼하면 평생 지니가 내 옆에서 떨어지려고 하겠어? 날 돌본다고 본인 인생을 망치고 말겠지. 당신 딸 인생 망치고 싶지 않으면 잘 좀 하자!!"


그 말을 하자 남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겠어. 여보. 내가 죽도록 노력할게. 잘 해낼 수 있을진 모르지 최선을 다할게. 여보. 그동안 혼자 고생 많았어!!"



남편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 마디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내 진심에 가까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27년 가까운 세월 동안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지켜온 내 가정을 위한 마지막 노력은 한번 더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오랜 세월을 참고 인내한 끝이 자유가 아님에 실망스러움이 없다면 그건 내가 살아온 모든 세월을 부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에 대한 두려움 또한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다.

하지만 난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파란만장한 세월을 꿋꿋이 버틴 나를 다시 믿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더 이상 함께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지금의 결정을 뒤엎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해 헤어짐을 불사할 마음 역시 각오가 되어있다.


 선택과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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