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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Jun 09. 2022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남편 놈의 살길은? 오로지 변화뿐!

이사하던 날  남편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말한 건 사실 우리가  앞으로 다시 잘 살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얘기했다기 보단 몇 시간 후 사형을 앞둔 사형수에게 최후의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마지막 온정을 베푸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난 지쳤고 고단하고 아팠다.


이제 나 아닌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을 베풀만한 눈곱만큼의 여유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 육체적인 통증과 정신적인 고통 모두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저 멍하니 통증에 휘둘리며 생각조차도 멈춰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무엇이든 섣불리 시도할 만한 상태도 아니었다.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고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숨을 제대로 쉬고 있지 않아 많이 진정되고 있었던 기절 증세가 다시 심해지고 있었다. 어디든 손이 닿는 곳에 자낙스 (불안장애의 치료 및 불안증상의 단기 완화 치료제)를 두어야 했고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공황발작 때문에 디아제팜 (정신 안정제나 골격근 이완제 등으로 쓰이는 약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분류)이 없이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병을 앓고 사고가 났던 이후로 햇수로 3년째가 된 올해가 돼서야 처음으로 생일과 사고가 있던 달의 선명한 기억에 지난 10년간 힘들었던 어떤 해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었다. 그저 하루하루 내 삶이 망가져 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병색이 짙어지는 나를 보며 스스로가 단호하게 마음을 먹고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 세 식구가 함께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거라는 걸 피부로 느끼는 듯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후에 어떤 말이 됐든 나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그건 이미 소용없는 사탕발림일 뿐이었다.  남편이 하는 그런 허튼 말들은 우리가 살았던 27년이란 허송세월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오히려 역효과만 낸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사실은 남편 자신도 어떤 방법으로 다가서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남편과 나는 정말 말이 잘 통하는 커플이었다.
상대방의 얘기를 가슴 깊이 공감하고 함께  기뻐하거나 함께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며 늘 나를 사랑해 주던 진중하고 담담한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라 믿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했던 그런 모습은 결혼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옴과 동시에 퓨즈가 나가버린 전등처럼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켜지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달라져 버렸다.
연애하던 기간 동안에  남녀 모두가 대부분 자신의 본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한다는 것쯤은 누가 일일이 알려 주고, 교과서에 서술되어 콕 집어 주지 않아도 누구든지 안다.

시부모님께서 올바른 부부의 모습과 부모의 상을 세우셨다면 남편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원인으로 따지자면 모든 게 남편 탓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모든 것이 그의 잘못 때문인 것으로 상황은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옆에서 아무리 사람이 죽어 나가도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 않는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떤 문제든 시간이 흘러 흐지부지 돼버리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잡은 물고기에 밥을 주지 않는다는 말처럼 남편의 사랑은 결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었고 결혼 후엔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픈 대로하고 살고 싶었던 이기적인 개인주의자가 남편이란 사람이란 걸 오랜 세월을 겪은 후에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를 갈라놓은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아무리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해도 또 아무리 남편을 사랑해서 모든 것이 눈을 가렸다 해도 결혼 전에 난 자만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득문득 보이던 남편의 가부장적이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며

지기 싫어하고 완벽 주의자였던 나는'저 아저씨 같고 고집불통인 성격 내가 꼭 고쳐놓고 말 거야. 두고 보자고 내 말 안 듣고 배기나!'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결혼 생활을 시작했었다. 나를 유리그릇처럼 대하남편이 평생 그럴 것이라 착각했던 것이었다.

사람의 본성은 절대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걸 몰랐던 어린 나의 처절한 패배였다.




사랑은 느낌이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인다.

말로 '사랑한다' 하지만 말이 다가 아니다.

교회를 다니던 작은 건널목을 건널 때 비가 오든 눈이 오든 8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손을 먼저 잡아 준 적이 없는 남편이었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내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를 위해 연애 2년, 결혼 27년 도합 29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같은 마음으로 노력했다.

긍휼 하는 마음으로, 애틋해하며, 아끼고 보듬었다.

내가 한 사랑에 책임을 지려 노력했다.

남편이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나 또한 마찬가지가 돼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딸에게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만약에 내가 남편에게 다시 한번, 마지막 기회를 준다면 그건 온전히 엄마를 위해 오랫동안 고생한 딸에게 끝까지 좋은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작정했고 딸이 독립을 하고 혼자 도저히 헤쳐나갈 길이 없다 생각하는 힘든 일을 겪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언제든 웃으며 반겨주는 나와 남편이기를 바란다.
또, 그 어느 날 문득 아무런 이유 없이 집에 오고 싶을 때나 자신의 집에서 쉬고 있는 순간조차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정말 피곤하고  지친 순간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와 남편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며 집으로 찾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부모가 되도록 노력해 보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내 간절함과 그간의 노력, 눈물, 상처, 인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남편이 드디어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들이 조금씩, 정말 조금씩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가 얘기했던 유튜브 채널에 꼬박꼬박 댓글을 달아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엔 말 같지도 않은 짧은 글들이었지만 어느새 영상 속의 강사가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고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처럼 보였다.


남편이 달아놓은 댓글들중 몇가지 입니다.


그리고 달라진 행동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27년간 보았고 27년간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결정을 했던 남편을 한 번에 믿을 수는 없었다.

이제껏 참다가 이제야 헤어질 결심을 어렵게 했는데 남편의 사소한 행동과 조금의 변화 때문에 이제 와서 모든 걸 망칠 수는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아프고 또 아팠다.

그냥 오늘 하루로 세상이 끝나길 바 날이 수십일이 지나갔다.


◇◇이가 외갓집에 갔던 어느 토요일, 남편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누워 버리려는 나를 따라 들어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은 그냥 그대로 있어. 내가 거기까지 갈게. 내가 달라지는 거 보면서 그 자리에 있기만 해. 이제 노력은 내가 할게.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당신이 힘든 순간마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내가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 당신이 같은 말을 몇십 번, 몇백 번 똑같이 하며 화를 내더라도 그때마다 내가 당신에게 최선을 다해 사과하고 바뀔게. 반드시 그렇게 할게."


사과와 뉘우침에 능하지 못한 남편이 온몸을 떨며 최선을 다해 내게 말을 건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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