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채움으로 도드라진 내 빈자리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말씀을 공경하고 예절 바른 것을 항상 당연한 일이라 배우고 몸에 익혀 살던 나였지만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옛말 틀린 것 없다'는 말을 뼛속 깊이 체감하고 있다. 비록 짧은 견식이지만 선조들의 깊은 지혜에 탄복하며 살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마음을 10년만 더 먼저 깨우쳤더라면 내게 생길 비극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라도 어떠랴.
안타깝다 생각하면 한창때의 10년의 세월이 아깝기 그지없지만 안달복달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이 내게 더 편안한 일이 될 듯싶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 내가 살길이 아닐까?
결혼 생활에 얽힌 것들을 정리하면서 아물지 않은 옛이야기, 옛 상처가 떠 오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우리가 살던 곳에서 이사를 나오던 날 내게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일들 말고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딸에게 들었다.
*결혼, 사랑으로만 하는 게 아니더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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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남편이 내게 보인 실망스럽다 못해 절망에 가까운 모습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 나 스스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친 여자처럼 돼버린 동생을, 또는 언니를 그리고 자식인 나를 오로지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어린 딸(조카, 손녀) 에게만 맡겨두고 원가족인 친정식구들이 나 몰라라 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을 두고 나를 괴롭혔다.
진짜 미친 것이 나인지, 아니면 그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러 이가 부서지고 목이 쉬어나가도 이 모든 걸 감당하는 게 오로지 딸 뿐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내 원가족은 내 실수가 아님에도 내게 책임을 묻고 나를 밀어내어 몇 년 동안 아무도 날 찾지 않는 벌을 주었고 남편은 자신의 잘못 조차 인정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기만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병과 참을 수 없이 아픈 고통 중에도 나는 기다렸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적어가며 매달렸다.
달변가였던 내가 통증과 독한 약에 말을 잃어 글을 쓰며 견디고 버텼다. 그렇게 견디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딸에게 몇 번이나 다짐받듯 건넨 말이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어. 지금은 불편해도 아닌 척 괜찮은 척 외면하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없는 빈자리, 내가 난 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거야. 그때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고. 분명히 그런 때가 올 거야."
아프고 원통한 마음에 무너지고 망가져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되뇌고 되뇌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고서야 외롭게 죽도록 아프고 고독하게 이를 악무는 투병생활을 견뎌낼 수 있게 됐다.
마지막 최후의 그때가 되면 어떻게 행동할진 나도 짐작하진 못했지만 나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었다.
이해할 수 없다 말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이해가 가능한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니 있는 그대로 써보려 한다.
여전히 아무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아이의 희귀 난치병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그때 아이가 이모와 다시 처음 연락을 하게 됐었다. 지니는 친정의 첫 손주였고 친정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친정과 사이가 틀어진 후 지니까지 희귀 난치 질환을 앓게 된 후에야 아이는 가끔씩 주말에 외가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모를 만나고 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족과 왕래를 안 하고 형제, 자매와 인연을 끊었다 해서 지니에게까지 억지로 강요하며 만나지 못하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 후로도 계속해서 아이는 외갓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직장 다닐 때 할머니가 키워주셨는데 더 늙으시기 전에 자주, 많이 뵈러 다니려고. 그렇다고 엄마한테 모질게 한 거 잊은 거 아니야. 그냥 내가 후회 안 하려고. 엄마 속상하지 않도록 오래 있다 오지 않을게"
지니는 외가 에서의 일을 내게 옮기지도 않았고 내 얘기를 외가에 시시콜콜 옮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적당히 싹싹하고 다정하게, 갈 때마다 구하기 힘든 맛있는 것이나 제철 과일 중 제일 좋은 것들, 뭐가 됐든 노인 두 분이 기뻐할 것들을 준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왔다.
그 행복한 시간 속에 지니의 싹싹한 다정함이, 능청스러운 것 같은 애교가, 무엇이든 잘 먹는 식성이, 빈 손으로 찾아가지 않는 예절이, 모든 질문에 똑 부러지는 대답이, 무엇보다 날 닮은듯한 모든 행동들이 다시 내가 없는 빈자리를 크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이가 아픈 이후로 가뭄에 콩 나듯 이어지던 나와 부모님과의 통화에 엄마, 아버지의 아쉬움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거리가 먼 무뚝뚝하고 쌀쌀맞은 목소리로 몇 마디만 나누던 나와의 전화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들 자리를 이제는 확실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연세도 많아지고 내 병 또한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