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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Sep 10. 2021

불행의 전조

분신이라고 여길 만큼 사랑한 동생

오빠와는 한 살, 동생과는 세 살 차이가 났었다. 그중에 둘째로 태어나 한 살 차이임에도 언제나 손이 많이 가는 오빠를 챙겨주고 받들어(?) 주었고 세 살 차이가 나는 숫기 없던 어린 동생 분신처럼 기고 살았었다.


동생은 어릴 적부터 늘 내게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동생을 둔 언니나 형이라면 의례 그렇듯이 동생도 내가 놀러 나가기라도 할라치면


"나도 언니 따라갈래. 엄마! 언니가 나 안 데리고 간대. 힝."


이렇게 외쳐대곤 내 뒷 꼭지에 매달려 어디든 따라다녔다. 친구들과 홀가분하게 놀기 매 순간 간절히 원했지만 이미 따라붙은 동생을 내치지 않고 누구보다 알뜰하게 챙기며 함께 놀다.

외갓집을 가서 엄마 없이 자고 오는 일이 생길 때면 세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언니였음에도 항상 팔베개를 해주고 낮의 즐거움을 잠시 잊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먹이는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잠에 들곤 했다. 이 일은 내 기억도 기억이지만 외갓집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얘깃거리였다.

자라면서야 한 방을 쓰면서 다투기도 하고 삐지고 따지고 여러 일들이 많았지만 그때는 부모님 밑에 있으며 같은 환경에 있었기에 서로 간의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부모님께서는 딱히 상처받을 만큼 크게 차별을 하지 않으셨고 내가 노력한 만큼 예뻐해 주셨다.

다만 어느 집의 둘째나 겪는 일은 내게도 있었다.

부모님은 항상 내게 더 많은 배려와 양보를, 인내를, 사랑을 원하셨다. 그리고 난 그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살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오빠나 동생, 모두 각자 나름대로 힘든 부분이 있을 거란 사실을. 각자가 겪은 부모님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평생 노력하며 살아온 내 인생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없다.

난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사랑한 가족이 나를 버리려 하고 있었다.




불같은 성미를 가지셨던 아버지와 닮은 사람을 피하고 싶었던 걸까?


나와 내 동생은 정말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남편감으로 선택하게 됐다.

남편의 치명적인 실수로 평탄치 않은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던 나는 범상치 않은 성격을 가진 동생과 제부가 결혼 초기에 서로 맞춰나가는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같은 아파트 한 동에 11층과 8층에 살았던 우리는 내가 조카를 돌보게 되면서 15년 동안을 함께 붙어살게 됐었는데 내가 남편과 겪었던 갈등 상황을 다시 고스란히 3년 동안 함께 겪으려니 우울증이 심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길 지경이었다.

둘이 말다툼이 생기기 시작하기만 해도 제부는 내게 전화를 해댔다. 동생이 한 번 얘기를 시작하면 자신의 뜻을 반드시 관철시킨다는 것을 알기도 했거니와 신혼이기도 하고 서로 기싸움을 하며 항상 선을 넘을 정도로 싸워댔다. 내용은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내용을 아는 건 고사하고 싸움을 하다 너무 격하게 진행돼 울다 탈진한 동생을 진정시키고 울고 경기를 하는 조카를 다독여 분유를 먹여 업어 재우고 제부는 내보내 남편과 맥주 한잔이라도 하고 오라고 시켰다. 어느 날은 너무 격분해 과호흡을 일으킨 동생을 응급실까지 보내야 했던 날도 있었다. 이런 일을 저녁이고 밤이고 새벽, 아침을 가리지 않고 거의 매일을 3년간 반복했다.

그 무렵 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려 죽을 뻔했고 동생은 병원으로 찾아와 고열에 몸도 못 가누는 나를 환자복으로 환의(換衣)시켜주며 자신 때문에 언니가 아프게 됐다면 한바탕 눈물을 쏟고 간 적도 있었다.


조카를 임신했을 때는 덧 때문에 고생을 하는 동생을 보며 집에서 식사를 만들어 동생네 집으로 가져다주기도 했었다. 나 역시 입덧이 몹시 심했었는 딸을 낳던 마지막 달까지도 구토가 심하고 냄새 맡는 것을 어려워했던 기억에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최대한 냄새를 덜 맡게 하고 음식을 가져가 먹게 하면 동생은 입덧 중에도 곧잘 음식을 먹기도 했다.

동네에 문이 자자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새언니는 내가 동생에게 이러는 모습을 보곤


"큰 고모, 고모가 나한테 어떻게 해주는데...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런 말 하면 벌 받겠지만  그리고 고모가 어떤 마음을 가진 인지 내가 너무 잘 알지만 역시 피붙이는 좀 다르네요. 작은 고모가 너무 부러워요."


그 소리를 듣고 놀란 나는 행여 새언니가 서운한 맘이 들었을 까 봐 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냐. 새언니. ㅎㅎ이 한테는 새언니한테 해주는 거 하나도 안 해주잖아.ㅎㅎ이랑 나랑 성향이 다르기도 하고. 그리고 ㅎㅎ이가 막내여서  엄마가 나이 드셨다고 잘 안 챙겨 주시기도 하잖아. 새언닌 장손 다고 아버지가 얼마나 챙기셨어. 새언니가 임신했을 때 내가 직장 다니고 있기도 했고. 그 대신 지금 선물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니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요. 알았지?"


서로가 샘을 낼 만큼 나는 가족들을 사랑하며 살다. 가족들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라 여기며 살았다. 내게 힘든 일이 생겨도 그 행복을 무너뜨릴만한 일이라고 여겨지면 그건 그대로 내 안에 감춰지고 묻어졌다.




동생이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과 난 얘기를 나눴다.

이제 막 돌이 다가오는 조카와 한참 엄마의 손길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초등 저학년인 딸을 위해 한 사람이 복직을 하고 남은 한 사람이 아이들을 돌보기로 합의를 했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은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다.

둘 다 경력직이었고 자리를 구할 수 있다면 페이도 보장된 안정된 직장이었다. 먼저 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복직하기로 얘기를 했고 그때 아픈 몸을 채 회복하지 못한 나 대신 동생이 회사를 나가기로 결정이 됐다.(사실 저는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직 신청을 하고 지점 발령이 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상선 질환과 부정맥을 고 있었고 바로 얼마 후에 베체트 진단을 받아 복직을 포기하게 됐습니다.)


그리고부터 조카를 9년 동안 기르게 됐다.

조카를 딸과 다르지 않게 키우려고 많이 노력했다. 오히려 더 좋은 음식과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만약 조금의 실수라도 한다면 그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 뜻 없이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어느 날 하루, 친정아버지가 조카를 데려가 저녁을 먹이고 동생이 올 때까지 데리고 있으시며 조카에게 이런 말을 물으셨다고 했다.


" 아! 이모가 때리지는 않니?"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 죽기로 노력했지만 마지막 2년, 내가 베체트에 걸리고 딸이 사춘기가 심할 무렵엔 소홀했다는 걸 인정했다. 어린 조카가 생각 없이 옮긴 말을 동생이 그대로 믿었다면 동생에게도 상처가 남았겠지.

하지만 조카를 기르는 문제로 얘기를 하거나 다툼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생은 복직을 앞두고 내게 약속을 한 가지 했었다.


"언니. 내가 돈을 벌어서 동이의 돌봄비를 주고 그 외에는 언니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못될지도 몰라. 하지만 남편이 한 사람 더 생겼다고 생각해 줘. 그냥 자매 말고 남편. 돈으론 다 못 도와줘도 언니한테 힘든 일이 생기면 그게 무슨 일이 됐든 끝까지 의지하고 의논할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가 한 사람 더 있다고 생각해 이젠. 항상 내가 언니 옆에 있을게."


동생은 이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다.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대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원하지 않는 시기에 했던 사과는 폭력이었다.


그리고 내게 다른 불치병이 생겼다.

오빠에 이어 동생마저 내게 등을 돌렸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리성 기억상실은 그때의 기억을 내게서 앗아가 버렸다.


내게, 내 결혼에 짙은 불행의 전조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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