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의 어떤 큰 불행과 고난, 역경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법이니까.
1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에야 그들이 내게 무슨 짓을 했든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땐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도 이해하고 받아 들일수 없었다.
오빠의 배려 없고 이기적인 한마디에 난 말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럴 생각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오빠의 이기심에 치가 떨렸다.
네가 인간이냐고,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냐고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단 한 번도 오빠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적 없었고 부탁을 거절한 적 없었으며 돕지 않은 적 없었다. 여린 오빠의 마음을 알아 비록 둘째였지만 맏이 노릇을 자처하며 부모님의 입안의 혓바닥처럼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군대를 다녀온 오빠보다 먼저 취업해 수시로 은행으로 찾아오면 항상 웃는 낯으로 용돈도 내주고 그저 덧붙이는 말은 "치부책에 다적어둔다~~^^."이 한마디뿐이었다. 오빠에게 얼마가 건너갔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뿐이다.
아무리 부모님이 도와주신다 해도 외벌이로 세 아이를 키우는 게 벅찰까 싶은 마음에 큰 조카딸은 항상 내 아이란 마음으로 옷이든, 공부든, 여행이든 딸에게 해주는 것 못지않게 해주는 걸 당연하다 여기며 살았다.
내 옷을 두벌 사면 새언니 옷도 당연히 한벌은 사야 했고 내가 예쁜 백을 사면 하다 못해 새언니의 지갑이라도 사서 바꿔주고 싶었다.
모피 한 벌, 명품 백 하나 아까워해 본 적 없었다.
생활비로 힘들어하는 달엔 돈을 보태고 장을 봐주고 미용실을 함께 가서 결제를 하고 하다 못해 목욕탕 비까지 생각하며 챙기고 살던 나였다.
말로, 글로 다 옮길 수 없지만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생색내지 않았었다.
조카와 새언니에게 이럴진대 내 핏줄인 오빠에겐 오죽했을까. 오빠 입에서 'ㅇ' 소리만 나와도 아, 에, 이, 오, 우.... 알아서 다 들어주고 도와주고 나누며 살았다.
그런 내게 돌아온 건 아픈 걸 하소연하지 말라는 차가운 거절과 내 연락처와 딸아이의 연락처를 차단시켜 버린 행동이었다.
그리고 새언닌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 내게 힘들어 죽겠다고 자신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전화가 온 것이 마지막이었다.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옛말 틀린 것 없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난 한 가지를 더 믿는다.
[인과응보]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새언니가 성당을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 하나님을 믿으면 죄에서 사함 받고 천국에 가지.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다.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분 이시다.
죄의 대하여 진실한 회개를 해야만 죄에서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살인하고 하나님 믿으면 다 천국 가나?
아니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는 구해야지.
시편 118편 7절 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1초 단위로 나뉘어 순간순간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CRPS초기 오빠와의 그런 일이 있은 후 난 완전히 이전과는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고 들었다.(사실 이제부턴 제 기억 일부와 딸이 이야기해 준 사실들로 글을 씁니다. 이후 4~5년 간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있어도 동영상이 아닌 사진 같은 느낌? 이랄까요. 부족한 대로 제가 겪은 것처럼 글을 적도록 하겠습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던 나는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서는 말을 할 수가 없어졌다.
교회에 발을 끊은 지 3년이 다 되어가고(믿음이 종이장 같던 전 두 번째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고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곳엔 계셔도 제 곁엔 계시지 않다고한동안 생각했습니다.)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매일 쫓아다니던 새언니도 그 일 이후론 안 보게 된 데다가 무슨 일인지 동생조차 뭘 하고 다니는지 말도 없이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가벼운 말다툼 후 한동안 연락 없이 지내고 있었다.
물론 우리 이스방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
내가 아프게 된 원인을 굳이 따지자면 깊고 깊은 이유는 둘째 치더라도 그 시작점에 있었던 사람은 이리 보던 저리 보던 단연코 우리 이스방을 떠올릴 수 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너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야.'
라고 굳이 일깨워준 사람이 우리 이스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한 가지 희귀 난치병도 모자라 두 번째 불치병까지 걸린 마당에 자신은 매일매일 늦은 시간까지 집 앞 골프 연습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들어오고 처음 겪어보는 해괴망측한 병 앞에 나와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딸 둘이서만 허덕이도록 그냥 모른 척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서럽고 분했다.
그래서 남편만 보면 눈에서 불을 뿜고 길길이 날 뛰었다.
"야!!! 이 ㅂㅂ. 이제 어쩔 거야. 나 어쩔 거냐고 죽을 것 같다고! 죽을 것 같이 아프다고. 차라리 날 죽이라고.... 난 더 이상 못살겠다고. 더 못 참겠다고. 엉엉 엉엉...."
딸아인 매일 내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고 내 투정과 신경질, 트집, 헛소리, 짜증... 등을 받아주며 내 병시중을 들어주었다.
음식을 만들어 무엇이든 내게 먹이려 애썼고 어떻게든 엄마를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 어느 누구도 내가 얼마나 아픈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절대 아무도 모른다.
다들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 짐작이라는 건 항상 직접 겪고 있는 고통의 백분의 일도 못 미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안 연락을 안 하고 있던 여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정말이야? 언니 정말 CRPS 된 거야? 언니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신이 없었어. 언니 미안해. 내가 지금 집으로 갈게."
"아니. 오지 마. 나한테 미안할 것도 없어. 그냥 너 하던 일이나 잘해. 나 신경 쓰지 말고. 다 귀찮으니까 오지 마. 문 안열 거야. 오지 마."
"언니. 화 풀어. 지금 금방 갈게. 미안해. 내가 좀 바빴어. 언니 그렇게 심하게 아픈 줄 몰랐어. 왜 연락 안 했어? 미안해. 잘못했어. 지금 갈게."
"나 화 안 났고. 괜찮다고. 오지 말라고. 힘들어. 오지 마. 다 필요 없고 귀찮아. 나 그냥 내버려 둬."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띵~똥~"
"지니야. 이모야, 문 좀 열어봐."
쾅! 쾅! 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울렸다.
"문 열지 마. 지금 내가 아픈 지 몇 달이 지났는데.... 같은 아파트 한동에 살면서. 뭘 하고 돌아다니느라고... 지 새끼 맡겨 놨을 때나 아쉽지. 다 소용없어. 열지 마. 지금 만나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