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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Aug 12. 2021

배신의 시작

사랑했던(?) 친정 가족들

꼭 착한 아이 증후군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또 내가 사랑받지 못하고 컸다는 얘기도 아니다.


부모님은 모두 성실하신 분들 이셨다.

아버진 많이 어려운 환경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성장하시 사회적으로 성공하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고 오직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다. 다만 모든 것 부족한 가운데 성공하려 애쓰시느라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으시면서 불같은 성격을 다스리지 못해 종종, 아니 아주 자주 '분노조절 장애'와 같은 모습을 보이셨다.

아버지를 너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아버지를 대하는 것은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 모두에게 고역이다 못해 무섭고 두려운 시간이었다.

그나마 시간이 흘러 우리가 자랄수록 그런 아버지와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하며 함께 밥을 먹고 TV를 보며 맞장구를 쳐드릴 수 있는 자식은 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아버진 무척이나 사랑하셨다. 

소심한 오빠나 뚝한 동생은 그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듯 굴었다.

시간이 흘러 모두 결혼을 한 후에야 아버지의 불 같던 성미도 많이 누그러지시고 우리들도 아이를 낳고 키우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친정엄마는 불같은 성격을 가진 아버지를 맞춰 드리고 틈틈이 자신의 상처 난 마음을 다독이며 세 아이를 기르느라 섬세하게 아이들 각자에 맞는 방식의 양육을 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항상 아버지의 마음을 살피는데 급급하여 우리 셋이 느꼈을 마음의 상처나 우리에게 남겨질 후유증을 걱정하기엔 엄만 시간도 여유도 없는 듯 보였다. 

아니면 여리고 줏대 없는 장남을 아파하며 셋 중 가장 고집이 세고 똑똑? 한(성적이 좋았던) 막내에게 올인하느라 상대적으로 트러블도 일으키지 않고 시키는 일도 곧잘 해내며 말도 잘 듣는 내게 관심을 덜 주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그면서 모든 심부름과 해결해야 할 일들, 당신의 한탄과 미처 처리되지 않은 분노와 감정의 찌꺼기까지 모두 내게 주시며 '네가 없었다면 내가 어찌 살았겠냐', '네가 내 자매며 친구'라던 엄마는 내가 가장 엄마가 필요했던 순간에 너무 쉽게 내게 등을 돌렸다.

자식을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지만 그렇지 않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지만 그중에 덜 아픈 손가락은 반드시 있는 법이다. 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엄만 잔정이 없고 무뚝뚝하셨다.


 부모님께 사랑받기 위해 죽도록 노력했고 노력한 만큼 사랑았다.

자식이 부모님께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이 얼마나 슬픈 말인지 혹시 짐작할 수 있는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다.




아버진 당신이 고생하시며 버신 돈으로 당신과 우리 셋의 가정을 한 동네에 모여 살 수 있게 해 주셨다.


동네에서  화목한 집이었다.

나와 새언니는 6살 차이가 났다. 새언니가 어렸다. 어린 나이에 오빠와 결혼해 쉽지 않은 시부모님을 잘 모시며(함께 살지 않았습니다. 생활비도 따로 대주시고 아이들 학원비, 과외비도 다 따로 지원해 주셨어요.) 까탈스러운 오빠와 잘 지내는 것이 고맙고 감사해 날 친정언니처럼 여기라고 얘기하곤 심으로 챙기고 보살폈었다. 동네에 소문이 짜했다.

시누이와 동서 지간이 이렇게 좋은 걸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노랫말처럼 듣고 다녔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옷 한 벌을 사면 반드시 새언니 옷도 한벌을 챙기고 내게 좋은 가방이 생기면 하다 못해 새언니의 지갑이라도 바꿔 주려고 신경 쓰며 살았다.

엄마가 혹 새언니의 허물을 얘기하려 하시면 (거의 없는 일이지만 전 감정 쓰레기통이었으니까요. 무슨 말인들 안 하셨겠어요.)


"엄마! 요즘에 새언니처럼 잘하는 며느리가 어딨다고 그래. 돈 주면 당연한 줄 알지. 새언니가 그런 적이 있기나 하나? 엄마, 아버지 말이면 죽는시늉도 하는구먼. 나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고  얘기했었다.

쓸어 담으면 허물도 복이 되고 버리자 싶으면 복도 허물이 되는 법이다. 세 아이를 키우며 애쓰고 사는 새언니의 편이 되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애써 주었다.

새언닌 그런 나를 엄청 따르고 의지했다.

안사돈 어르신이 일찍 돌아가셔서인지 내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바다.


오빠는 그냥 자기애가 강한 소심하고 질투심 많은 인간이었다.

평생을 징징대며 신세한탄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도대체 뭐를 더 해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이 평생 생활비를 보태주고 아이들 학원비도 보태주고. 결혼 전엔 제가 먼저 취직해서 매달 은행으로 돈 달라고 찾아오고 집에서도 빌려? 주고 결혼 후엔 새언니 챙기면서 오빠나 애들은 모른 척했을까요? 온갖 앓는 소리, 힘들다는 소리, 돈 얘기.... 다 들어주며 도와주고 살았습니다. 못나도 내 형제, 오빠니까요)하며 심지어 어릴 적 겪으며 셋이서 맹세했던 우리 아이들에게는 절대 하지 말자던 약속(분노 조절 장애로 인한 소리 지르지 않기, 물건 부않기) 혼자 지키지 못했다. 

부족하고 못난 오빠라 생각했어도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어도 단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나 보이게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깍듯이 챙기고 위신을 세워주려 노력했다. 항상 많이 아픈 건 나였지만 오빠의 한탄이나 힘든 얘기를 듣는 것도 나였고 오빠 와의 식사 약속에 계산을 하는 것도 항상 나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부모님께 받은 사랑과 도움이 많다 생각했고 가족이기에 아깝다 여긴 적도 없었다.

오빤 내가 입원을 시작한 후 10년 이래 날 문병하러 병원으로 온 것이 딱 세 번 뿐이었다.

마음 가지 않는 곳엔 몸도 가지 않는 법이니까.


여동생은 나와 세 살 차이가 났다.

무뚝뚝하고 개인주의였던 엄마의 성격을 제일 많이 닮아 오히려 키우면서 엄마가 제일 힘들어했던 상대가 동생이었다.

남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고 민폐 끼치는 걸 용납하지 못하며 그런 만큼 자신도 남에게 크게 베푸는 것 없이 그렇게 열심히? 사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 주변 상황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런 아이였다.

자랄 때야 많이 투닥거리며 자랐어도 또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어도 죽고 못 살 정도로 지극히 서로 사랑하는 자매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동생은 우리 딸을 친구처럼 사랑하고 나는 동생의 아들을 9년 동안 양육할 만큼 서로를 도우며 살아왔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 8층과 11층에 살면서 조카를 데리러 올 때 자주 저녁을 해 먹이고 항상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심야영화를 보고 서로가 산 책을 바꿔 읽고 쇼핑도 함께 가고....

동생 항 조금의 배려가 부족했다.

조카를 봐주던 마지막 2년 동안 베체트로 한참 고생을 할 무렵에 동생이 하루 휴가라도 내는 날 이면 매일 집에만 있던 난 덕분에 오랜만에 함께 바람이라도 쐴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 기대는 번번이 묵살됐었다.(항상 평일 휴가엔 근교로 바람을 쐬러 가던지 쇼핑을 하던지... 암튼 조카 때문에 매일 집에 있어야 하는 제게 미안해했었습니다) 연락이라도 올까 싶어 종일 기다리던 마음은 오후 4시가 넘어가면 실망으로 바뀌어 다시 침대에 아픈 몸을 누이고 눈물 흐르게 만들었다. 내가 많이 아파지면서 가족들은 조금씩 내게 무심해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내게 칼을 꽂은 건 오빠였다.

내가 CRPS(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진단받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오빤 통화를 시작하자마자 내가 끼어들 새도 없이 마구 말하기 시작했다.


"ㅇㅇ아. 잘 지냈어? 아~~~. 오빠가 있잖아. 너무 힘들어서 블라블라 블라~~~~~~"

"오빠! 잠깐만! 나 얘기 좀 할 게 있어. 오빠. 내가 좀 많이 아파. 지난번 수술한 데가 잘못돼서 CRPS가 됐어. 그게 뭔진 검색하면 다 나오고. 내가 앞으로도 오빠 얘기도 다 들어주고 맛있고 비싼 밥도 다 살 테니까 가끔, 정말 가끔 나 너무 아프고 힘들 때 힘들다고 한번  말하면 좀 들어주면 안 될까? 진짜 너무 아파서 그래."

"아.... 아니. 하지 마. 나한테 그런 거 하지 마."


난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오빠가 내게 이렇게 말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우리 오빠, 아니 내 오빠. 내가 노력하고 공들이고 세워주고 부족하지만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내 오빠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거 하지 마. 나한테 힘들다는 얘기하지 마. 이미 내 문제만도 벅차. 그냥 하지 마. 우리 그런 얘기하지 말고 나 낼모레 휴문데 점심이나 먹자.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 풀릴 거야. 네가 쏠 거지?"


아프고 힘들어하는 동생 따위는 오빠에게 단 한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오빠에게 버려졌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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