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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Aug 06. 2021

운명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래?(두 번째 희귀 난치 질환)

처음 시작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몸이 아픈 상태에서 조금 더 불편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 왔던 큰집 식구들도 모두 돌아가고 남편은 내게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으로 조금씩 집에 신경을 쓰는 듯 보였고 한동안 우리 집 꾸며진 평온함유지되었다.


시아버지의 밉상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다시 체감한 남편은 자기 스스로도 치를 떨었는 데다가 아주버니까지 어와 어머님의 유품이 단 한 가지도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안 후에  사람 사이에 큰 분란이 었다고 내게 전했다.(전 관여하고 싶지 않았고 관여할 만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엔 입원 중이었거든요ㅠ.)

게다가 시아버진 아주버니네가 한국을 다녀간 후 남편이 안부 전화를 드릴 때마다 둘째이자 막내인 남편에게 아주버니의 걱정과 염려만 늘어놓으시며 남편의 마음에 못내 서운함을 심어 놓으셨다.(자신의 아내딸이 아픈데도 아버지가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남편은 못내 서운해했다.)


자랄 적에도 엄하게 대하셔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던 남편은 내가 중재자 역할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시아버지나 남편의 마음엔 내가 다시 집안의 윤활유 역할을 하며 이런저런 일들을 중재하면서 집안에서 큰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움직여 주길 바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시가 식구 중에 누구 한 사람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불편하고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내가 나서서 해결해 주길 바란다는 자체가 정말 를 바보 천치 취급을 하는 것 같아 가 차고 우스웠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김치 국물을 항아리째 들이켜고 헛 트림질을 해대는 꼴들이 가관이 아니었다.

웃기고 자빠진 데다 지랄 염병이었다.

그런 말 말고는 적당히 표현할 말도 떠오르지 않다. 내가 정말 만만하게 보였나 보다.

 등신 천치 바보로 생각했었나 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젊은 나이에 병원이나 들락 거리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지 다들 알면서 참 치는 시궁창에 처 박은 인들이다 싶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즈음의 난 겉으로 보이는 꾸며진 평온함에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많이 지치고 힘들어 하긴 했지만 혼자서 병원을 다닐 수 있을 만한 체력이 남아 있 때였다.

그리고, 매주 친정집에 모여 정아버지가 반드시  사주시는 저녁을 먹거나, 친정집 테라스에서 바비큐 구워 먹는 시간들이 무조건 행복하다 여기했다. 착각도 유만부득이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깊은 스트레스가 쌓여 있어 한순간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어요. 항상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온전히 그 시간을 즐겨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지금은 비록 몸은 아프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고 난 후부턴 그런 마음과 기분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너무나 만족스럽고 남들은 겪어보지 못한 은혜 넘치는 신앙생활도 하고 있다 믿었다.(전 그때 주님을 믿는 제 모습을 믿은 것 같아요. 교회 일에 몰두하고 유명? 해지는듯한 착각에 빠진, 믿음이 깊다 믿는 제 허상 말이에.)

어쩌면 남편의 잘못을 용서하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충만함이 가득 차올랐을 때이기도 했다.

남편이 내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은 것을 덮어 버릴 수도 있을  같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열심을 다해 나았던 병들 말고 또 새롭게 확진받은 희귀 난치 질환 베체트병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편의 외도 이후 가장 힘들었던 일.

남편을 다시 믿는 일. 그와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 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 마음이 내겐 0.0000001%도 남아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십견이라 생각하고 집 근처 가까운 곳에 있던 정형외과에서 진료받던 양쪽 어깨의 통증이 점 심상치 않아져 가고 있었다.

달 동안 물리치료를 병행하 스테로이드 주사를 어깨에 맞아가며 통증 치료를 병행했지만 전혀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하는 나를 보던 베체트 담당 교수님이 협진 요청을 해주셨고 정형외과 교수님은 검사 후에 오십견이 아닌 '회전근개 파열'이라고 단을 했다. 여기서도 주사 치료를 몇 달간 이어가며 받던 중에 '앞으로 나란히' 이상은 움직일 수도 없던 팔이 그나마 왼쪽 팔은 통증도 줄어들고 '만세' 동작까지 무리 없이 이어졌다.

말썽을 부린 주로 사용하던 오른팔이었다. 그나마 되던 '앞으로 나란히'는 고사하고 '차렷'자세에서 꼼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견디던 회전근개가 모두 끊어져 수술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게 됐다.

평생을 큰 반항 한번 없이, 지랄도 치지 않고, 중간에 끼인 둘째로 맏이 노릇 하며, 온갖 눈치 보느라 여태껏 차렷 자세 말곤 '쉬어' 한 번 없이 살았는데 병까지 나한테 지랄염병이었다.




여태껏 그랬듯 그 일 역 내게 어떤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수술 후 5개월이 지날 무렵 정형외과 교수가 내게 말했다.


"수술은 잘 됐고 재활도 잘하셨고 운동성도 나쁘지 않은데 지금까지 이렇게 통증이 심하신 걸로 봐선 정말 죄송 하지만 제가 더 봐드릴 건 없고요. 진료과를 옮기셔서 검사를 좀 받아 보셔야겠지만 CRPS(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전과해서 예약 잡아 드릴 겁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는 동안 나와 딸의 옆에 남편은 없었다.

변함없는 우리 남편은 꾸며진 평온함이 내 희생과 배려, 노력, 의지로 (그리고 내 나름의 이유도 물론 있었지만) 이뤄졌다는 걸 그새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딸에게 모든 걸(엄마의 입, 퇴원, 수술) 맡기고 예전처럼 여전히 자신의 생활을 오롯이 즐기며 살고 있었다.


내게 두 번째 희귀 난치 질환이 찾아왔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통증을 일으키는 병 CRPS(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난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기억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운명이 내게 종주먹을 들이대며 물었다.


자... 너 이제 어떻게 할래?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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