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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Jul 06. 2021

꼴값 집합소

지랄도 가지가지

뭐가 됐든 '싫지만 부딪혀야 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되도록이면 침착하고 담대하게'라며 생각하고 사는 나였기 때문에 공항에서 병원 먼저 들르겠다는 남편 전화에 짜증이 불끈 솟구쳤지만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마음을 가진(크리스천이지만 말입니다.ㅎ) 사람이라 해도 16년 만의 만남을 세련된 강남 아줌마의 차림새 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 빈곤한 영양실조의 모습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런 상황을 만든 남편이 꼴 보기 싫어 미칠 지경이었다.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간호사실에 검사 일정을 물었지만 진료 사이사이 빈 시간에 부를 예정이라는 답답한 대답만 돌아왔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지친 몸을 누이고 설핏 잠이 든 순간이었다. 병실 문을 요란하게 열어젖히며 남편이 들어왔다.


"여보? 여보! 형네 왔어. 여기 형 왔어. 아이고. 잠들어 있었나 보네. 미안해. 두통 괜찮아?"


조금 큰소리만 나도 심해지는 두통에 의사도 간호사도 다들 속삭이듯 얘기해 주고 있는 걸 함께 사는 남편만 매번 잊는가 보다.


"괜찮아.(이를 악물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여기는 뭐 하러 오셨어요. 어머님 모셔놓은 곳 갔다가 얼른 쉬시지... 다들 잘 지내셨죠?"

"아이고. 제수씨. 많이 아프시네요. 당연히 와봐야죠. 제수씨가 고생 많으시네요. 우리 ㅂㅂ도 고생 많고요. 의지할 데 없이... 제수씨는 말할 것도 없이 고생이지만 가 보니 우리 ㅂㅂ도 엄청 고생하겠네요. 제가 보기엔 그냥 우리 ㅂㅂ 이가 제일 불쌍하네요."


하.... 참나. 이게 뭔 신박한 개소린지.

병원에 입원해 누워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자기 동생이 제일 불쌍하단다.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형님과 함께 온 조카들이 인사를 하는 통에 그냥 넘어갔지만 그 말은 명치끝에 비수처럼 깊숙이 박혀 버렸다.

게다가 마중을 하러 시아버지도 함께 공항에 나가셨다가 병원으로 오셨는데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난 다리가 아파서 밖에 앉아 있으련다"


하시곤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나가 버리셨다.

시아버지를 못 본 지 거의 1년 반이 넘어가던 때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2년 뒤 새 여자랑 사시겠다는 선언을 하시고 남편이 내게 챙겨 보내던 쌀과 반찬을 보내지 말라는 얘기를 했었다. 두 부자간의 감정이 어떻든지 간에 매정하게 그럴 수 없었던 난 한동안은 하던 대로 유지했었지만 몸이 많이 아파지면서 미처 챙길 여력이 없었다. 시아버진 당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 아들의 뜻이 아닌 내 에 의한 일이라고 굳게 믿는 듯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내가 뭐라고 설명한들 내 얘기를 믿지도 않으실 거고 입 아프게 설명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기분이 괜찮은 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아파도 괜찮으냐 관심 한 번 주지 않던 양반이 억지로 병원에 함께 와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괜찮냐는 말도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거다.

정말 의 총 집합소였다.




퇴원을 하고 집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아이들은 두고 형님과 아주버니는 먼저 돌아간다며 식사를 같이 하자는 재촉이 성화 같았다. 어디 찢어진 델 꿰매고 온 것도 아니고 입원했다가 퇴원하면 가진 병이 순식간에 싹 다 낫는 것도 아닌데 정말 배려라곤 개미 똥만큼도 없는 인사들이다.

하지만 내 구덩이 내가 파고들어 앉았으니 내가 내 눈을 파야지 누구 탓을 하겠냐!!!!


내가 병문안을 받아들이고 남편이 날 병원에 둔 채로 운전수 노릇을 몰래 하고 다닌 것을 알고도 모른 체하며 먼저 떠난다고 하는 아주버니네 식구들을 불러 집 근처의 솜씨 좋은 중 요릿집에서 대접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남편에게 조금의 섭섭한 마음 남기지 않으려는 한 가지의 이유와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외가 식구들만 딸아이를 챙겨주는 것 같은 생각에 항상 마음에 걸렸을 것 같은 남편을 배려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같은 핏줄인 아빠의 형제가 아빠와 우리 가족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함께 맛있고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백화점에선 형님의 화장품과 신발을 선물하고 돌아오는 길인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는 조카들이 필요하다 말하는 로드샾의 화장품과 유행하는 옷들, 신발들.... 한아름의 선물을 안겨주어 비록 내 몸은 좀 힘들고 고단했지만 남편에겐 행복한 저녁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 시간이 지난 시간들의 나쁜 기억들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너무나 단순하게도.


그날 저녁에 아주버니네가 미국에서 가져온 선물 꾸러미를 개봉했다.

여러 벌의 남편 골프복과 골프공, 골프장갑.

그리고 S&B 카레 4개.  아플 때 먹는 사탕 HALLS 큰 봉지. 딸에게 사고 싶은 거 사라며 백 달러.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지금이 혹시 1970년대 인가? 카레가 웬 말이며, 목 사탕이 웬 말이냐 말인가. 아주버니와 형님이 내게 빅 엿을 먹였다. (그 와중에 자기 동생 거는 알차게 챙겼다.)


긴말할 것도 없었다.

내 구덩이 내가 파고 들어앉은 내가 총체적 난국의 미친년이고 이스방 집안 꼴값의 총 집합소다. 아마 나도 그중 하나돼 가는 듯싶다.


그러니 이제  미친년 지랄 좀 보여줘야 되 을까?

아니 시작이 좀 늦었나?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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