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부모님은 내가 자라는 동안, 또 직장을 다니다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 부모에 못지않은 넘치는 사랑과 서포트로 나를 지키고 보호해 주셨다.(제가 느끼는 정서적 부족감에 대해선 예외로 생각하고 얘기하려고 합니다.)
친정 집이 대단히 잘 사는 재벌 집도 아니거니와 처음부터 잘살던 집도 아니었기 때문에(오로지부모님 두 분의 노력으로 일군 재산) 나는 어릴 때부터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거기에 아버지 홀로 외벌이 만으로 악착같이 일군 재산이라는 걸 알기에 항상 어떤 돈 보다 친정 부모님의 돈은 어렵게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은행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깨닫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돈은 항상 책임과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후에야 알게 됐던 사실이었지만 특히 친정아버지는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척도로 '돈'을 사용하셨다. 작정하고 그러셨던 건 아니지만 자신의 결핍이었고 간절함이었던 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는 않겠다는 굳은 다짐 때문이었던 듯싶었다.
우리 남매들이 모두 결혼을 한 후에도 우리의 모든 대소사를 알길 원하셨고 당신이 거기에 결정권을 행사하길 강력히 바라셨다. 거절이나 이의제기 같은 건 처음부터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모르게 하기로 작정했으면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이 완벽하게 입을 맞춰야 했다.
아버지의 '돈'은 항상 감사하게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마다하겠다는 생각은 품어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
아버지의 돈은 내게 든든한 힘이고 뒷받침이었지만 한편으론 언제나 내 어깨를 찍어 누르는 짐이었다.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어도 나는 부모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을 테지만 내가 힘든 순간마다 도와주신 그 돈으로 인해 항상 부모님을 향한 내 사랑과 노력은 퇴색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는 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남편이 내게 상의할 것이 있다면서 조용히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때는 직장은 퇴직했을 때였지만 조카를 양육(여동생 아들을 11개월 때부터 9살까지 키웠어요. 같은 아파트 한 동에 위아래 층에 살았었습니다.)하면서 비록 몸은 아파도 여전히 맞벌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을 택해 둘이서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달라는 남편의 유난스러운 부탁에 싸한 기분이 들어걱정이 앞서기도 했었지만 우선 얘기를 들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은 조심스럽게 내 기색을 살피며
"여보. 내가 이제 나이도 좀 들어가고 회사에서 더 올라가 봐야 부장 이상은 어려울 것 같고... 도매상까지는 못하더라도 개인 사업자로 나가서 따로 영업을 해야 할거 같아. 계속 회사에 남아봐야 길어야 5년 못 버틸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 돈 모은 것하고 부족한 건 죄송하지만 장인어른한테 말씀드려서 좀 융통해서 사업자금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남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드디어 이 인간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반대로 난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지치지도 않고 이렇게 참신한 개소리를 당신한테 계속하는 거야? 당신 머리에서 나온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 아닌가? 당신이 이런 참신한 개소리로 다른 사람이랑 부화뇌동하는 건가?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조폐공사야? 뻑하면 돈 내놓으라고 하게? 말씀드릴 용기는 있고?
아버지가 협찬하신 돈이 벌써 못해도 수 억은 될 텐데. 돈은 둘째치고 왜 그러는지 차분하게 나부터 설득해 봐."
남편이 하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당시엔먹고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그 후론 아이의 대학교, 졸업 이후, 노후 준비, 기타 등등....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들로 지출은 늘어가게 될 것이고 지금보다 안정적이고 높은 수입이 보장돼야 하는 상황이기는 했었다.
아무리 내가 조카를 돌보며 돈을 보태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그건 딸의 교육비 정도를 메꾸는데 불과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돈 얘기를 꺼내기는 죽기보다 싫었었다.
왜냐하면 우린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결혼할 때만 해도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가 당연하게 생각되던 때였었다.
처음엔 집을 사주겠다고 큰 소리를 치던 시가는 중간에 말을 바꿨고 신혼은 전셋집에서 꾸리게 됐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신행을 갔던 첫날 저녁에 은행에서 직원에게 나오는 직원 대출 3천만 원을 받아 오라고 내게 시키며 내 뒷목을 잡게 만들고 말았다.
그것을 필두로 전세 계약이 오를 때마다, IMF로 잠시 힘들었을 때... 수도 없이 친정아버지의 도움이 받아야 했다.
심지어 시가에서 언젠가는
"친정아버지한테 이자 없이 돈 좀 빌려서 집을 사라. 이럴 때 돈 많은 아버지 덕 좀 보는 거지. 돈이야 천천히 벌어서 갚으면 되는 거고."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해대고는 했었다.
염치를 밥 말아 드셨었나 보다.
그럼 나는 아무리 속이 끓어 올라 눈에서 불이 쏟아져 나올지언정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까지 도와주신 게 얼만데요. 남은 건 다 쓰고 가실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 딸 차별 안 두고 똑같이 도와주신 게 어딘데 뭘 더 바라요. 이번엔 아버님이 좀 주세요. 네!!!"
이렇게 돌려 대답을 하고는 했지만 마음속에 쌓이는 화는 어쩔 길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병원과 집을 왕래하던 마지막 무렵에(간암 말기로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한 달 정도는 병원에 계시지 않고 왔다 갔다 하다가 마지막 입원에 중환자실, 1인실에 계시다 돌아가셨어요.)
어머님 통원 치료를 편하게 모시고 싶은 마음에 오랫동안 타던 gas 차에서 중형 세단으로 차를 바꾸는데도 친정아버지는 천만 원을 보태 주셨었다.
이랬는데 무슨 말을 또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답답한 내 맘을 이해는 하고 있는 건지. 내가 힘들어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 건지.
도대체 염치라는 게 있기는 있는 건지 있었다면 대체 어디에다 흘리고 내게 왔는지.
남편과 긴 얘기를 나누고 또 내가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알아본 후에 갈 길을 정하고 며칠이 지나 남편에게 얘기를 했다.
"당신이 얘기한 대로 알아보고 우리가 가진 것과 준비할 수 있는 것 최대한 다 준비하고 아버지 한텐 최소한을 얘기하되 나한테 얘기한 것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얘기하면 절대 안 돼. 아버지가 은행만 30년을 넘게 다니셨는데 그렇게 하면 '아~. 그렇구나. 옛다. 돈' 이러고 주시겠어? 간단하게 계획서 작성해.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그냥 주시는 건 천이됐던 억이 됐던 그냥 주고 마시지만 빌려준다 하신 건 십만 원도 꼭 받으시는 거.
약속이 중요하다는 거 잊지 마. 당신이 빌린다고 했으니까 반드시 갚아. 당신 이 돈 안 갚으면 진짜 큰일 나. 정말 찍혀. 회복 못해. 계획서 작성되면 같이 가줄게. 아버지한테 돈 얘기하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그 주 주일 전에 남편과 나는 친정부모님을 따로 찾아뵈었다.
부모님께서 언제나 내 편이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나지만 난 한 번도 부모님 앞에서 긴장을 풀었던 적이 없었다.
그저 웃으며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순간에도 나는 항상 빚진 마음, 무언가 보답해야 하는 마음이었다.
그날은 그런 나에게 한 가지 짐을 더 올리는 날이었다. 숨을 아무리 깊게 들이마셔도 목구멍 이상으로 더 깊이 들이마셔지지 않는 답답함.
친정아버진 걱정하셨지만 흔쾌히 큰돈을 만들어 주셨고 이스방은 사장님이 되었다.
모든 것이 다 잘 풀린 듯 보였지만 한 가지,우려했던 일은 결국 일어났다. 이스방은 변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께 빌린 금액의 2/3 정도에 못 미치는금액만 갚고(물론 원금만) 그 이후엔 돈을 갚지 않았다. 친정아버진 괜찮다고 말씀하셨지만 괜찮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