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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May 02. 2022

집 밥의 위대함

침묵의 5개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하[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 비싸고 좋은,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음식을 비싼 돈을 들여 사 먹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천명(知天命)의 세월을 건너오며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지나면서 내게 있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뜻은 비록 귀하고 비싼 재료가 아니라 해도 내가 손수 만든 음식을 온 가족이 함께 맛있게 먹는 것을 최고라고 여기고 말하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 잘한다고 소문나 있는 맛집을 찾아가 맛있고 귀한 음식을 사 먹는 것 역시 포함돼 있기도 했다. 어쩌다 남편과 함께 먹지 못할 때엔  밥인 경우엔 준비한 음식을 저 덜어 놓고 먹고 외식을 했을 때엔 따로 사 가지고  맛이라도 볼 수 있게 준비해 주다.

여느 집처럼 나 역시도 그런 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더 유별나게 챙기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내 사이가 불편하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욱 각별히 보듬고 챙겼다. 다른 건 몰라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먹는 것으로 서운한 마음이 들게 하는 건 나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우리 집만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아무리 심하게 부부싸움을 했다고 하더라도 또 내가 많이 아파서 마트에 다녀오기 힘들었을 때에도 단 한 번도,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지거나, 맛있는 것을 우리끼리만 먹는 다던가 하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아직도 내 세대는 중간에 끼어 친정어머니가 아버지께 하던 것을 보고 자란 그대로 남편에게 했었다. 나 같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그런 세대였다.

내가 아주 많이 아파지기 시작한 이후로도 웬만한 건 딸이 내가 만들어 놓은 레시피 북으로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였다. 다행히도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를 닮은 딸의 요리는 제법 입맛에 맞는 음식이 되어 오랜 병원 생활로 입맛을 잃고 아픈 몸으로 음식을 하기 어려워 주문해 먹던 바깥의 자극적인 음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편도 알고 있었다.

내가 맛있는 반찬을 해주고 잔소리를 해대며 신경을 써주는 모든 순간이 정말 다행인 순간이라는 것을....

여러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 집을 지탱하고 지킬 수 있었던 건 집 밥이 가진 놀라운 힘 덕분이었다.

부부가 26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했는데 어떻게 나쁜 일들로만 채워진 시간을 보내기만 했을 수 있을까?

힘들었던 순간을 드러내어 쓰는 글이었기에 얘기할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 사실 어느 순간부터 인가 남편이 측은하게 보일 때가 간혹 있었다. 남들 눈에야 구들을 등지고 누운 내가 누구를 측은하게 생각한다는 건지 혀를 차는 소리를 냈을지 모르지만 남편에게도 이제 남아 있는 가족은 우리뿐이었다.

72세라는 너무도 안타까운 나이에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듯 새장가를 드신 시아버지, 영주권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던 아주버니, 그 이 후로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남편의 골프 복 몇 장을  내곤(아웃렛에서 구입한 것으로요. 단 한 번도 포장이 되어 있는 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와 딸의 선물은 바라지도 않지만 일절 없었고요. 콩이 덕분에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촬영할 때 마침 한국에 들어와 있어 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제가 얼마나 아픈지 다 보고 들어간 이후에도 괜찮냐는 안부 전화 한 번이 없었습니다) 걸 빌미로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운전기사 노릇을 원하고 숙소가 필요하다 어필하고 온갖 바라는 것 천지였었다.

남편에게조차 그들은 이제 기억조차 희미해진 사람들에 불과했다. 남편 역시 고아라고 해도 마땅할 만큼 외로운 사람이었다.

태어난 기질도 그렇지 못남편이, 가장이, 아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처사인지 뭐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람이 남편이었다. (물론 이건 듣기 좋은 변명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리고 그 모든 것들이 남편이 수도 없이 많은 실수와 잘못을 했을 때 내가 남편을 곧바로 내지  못하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내가 가진 병중에 측은지심은 고질 중에 고질인 약도 없는 병이었다.


그런데....

항상 냉장고에 가득 채워진 반찬을 보며 안도하는 마음가졌을 때에 남편은 기어코 끝장을 보고 싶은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항상 남편을 이해하고 보듬으려 노력했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고 결국엔 이런 일들이 생기고 말았다.


이번 싸움? 이 지난 모든 다툼들과 달랐던 건 내가 남편을 투명인간 취급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남편과 잘해보려는 0.1%의 의지도 내게 남아 있지 않 생각했다.

내가 남편에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남편 스스로 브런치 작가님이 운영하는 유튜브에 댓글을 달기로 약속한 후 집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달라져야만 했고 이전의 나를 버렸다.

이젠 끝다, 싫다고 여겨지자 목소리, 숨소리, 웃음소리, 먹는 소리.... 모든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약속했던 대로 식사는 모두 밖에서 해결하고 오도록 밀어붙였다. 물 말고는 남편이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아것도 없어졌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딸과 둘이서만 먹고 말았고 남게 되더라도 미리 남겨둔 것이 아니라 다시 둘이 해결하고 말았다.

주문을 해 먹던 만들어 먹던 이제 남편의 것은 없었다. 평생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며 살았던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싶었던 일이,

너무도 속 시원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버려지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걸 깊이 깨닫기 시작했다.


집 밥을 먹지 못한(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지 마는지 모를) 시간이 5개월이 넘어가 남편이 초조해하는 기색이 완연해졌다.

(말로 표현하기 좋아 집 밥인 거지. 남편은 속옷 한 장, 양말 한 켤레, 운동화 한 벌.... 자신이 두르고 입고 쓰는 모든 사소한 것부터 하다못해 거래처에 세금 계산서를 발행하는 일까지 나와 딸의 손을 거치지 않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받아주며 산 것이 아니고 어머님께서 아들 둘 중 막내아들이라고 처음부터 엄청 치마폭에 싸고도셨어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 내게 대못을 치는 걸 보신 후에야 아버님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아들을 치마폭에서 패대기쳐 내던져 버리셨던 거죠. 여장부셨어요. 저를 많이 사랑하시고 안타까워하시고요. 돌아가시기 바로 전 까지도 베체트에 걸린 나를 병원으로 간병하러 오지 못하게 하셨지만 제가 할 도리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여명이 다하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께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안 계시더라도 ◇◇아빠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살 테니까 걱정 하지 마시라고요)

 

거기에다 뜻하지 않은 일마저 생기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자유의 여지를 맛본 내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몰라 휘둘리고 있을 때 느닷없이 '공황 발작'이 일어나 나를 잡고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한 몸이 독한 마음과 의지를 견디지 못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고 몸이 재촉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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