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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Apr 10. 2022

자발적 투명인간

결자해지(結者解之)

미처 정리되지 않은 짐들과 널브러져 있는 전선들, 아직 배송되어 오지 않은 가구들로 인해 엉망인 채로 있는 집으로 강아지들과 돌아온 딸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그건 콩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보자 반가움에 비명을 지르 덤비려 하던 콩이는 바로 꼬리를 다리 사이로 감추고 조용히 내 다리 옆에 앉아 내 손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상황에 천진하게 까부는 건 그저 해맑은 우리 막내 강아지 리아뿐이었다. 딸은 아무 말없이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침대 커버와 패드를 깔아주고 난방용 텐트를 침대 위에 설치해 집을 옮긴 첫날부터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었어요)

사실 딸아이가 엄마와 아빠가 싸우고 있것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이사하기 몇 달 전부터 남편과 나의 갈등이 끝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내심 어느 방향으로든 빠른 정리를 원하기도 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끌어 온 갈등과 상처, 모든 아픔들에 책임을 질 시간이 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일의 희생양이었던 내 고통을 끝낼 시간이 왔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마음이 여리고 사랑이 많아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에 대가 없는 무한한 기쁨을 느끼며 살지만 내게 상처를 주 실수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는 면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다만, 상대의 실수 후에도 두세 번의 기회를 주고 함께 보듬어 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덕에 인복(人福)이 많아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는데 큰 도움을 얻기도 했다.

남편과 힘든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두세 번이 아닌, 수십수백 번의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내 아이의 아빠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남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내 약한 마음을, 이젠 그 모든 것들을 끝낼 때가 됐다고 여겼다.


"♥♥이 들어왔으니까 이제 더 큰 소리 내기 싫어. 그럴 기운도 없고. 내가 나가?♥♥이 한테 짐 싸라고 해? 그래도 되고. 그런데 나한텐 늘 모질었으니까 난 그만두고 라도 이사 준비하면서 나 대장염 병시중하느라 죽도록 고생한 아픈 자식 이 밤에 내 쫓긴 당신도 싫지 않아? 어떡할까?"


고성이 오가던 시간들이 지나고 내 얘기를 조용히 듣던 남편이 가만히 얘기를 꺼냈다.


"여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할게. 잘 들어 봐. 지금 내 방이 거실하고 주방, 안방하고 떨어져서 동선이 안 겹치잖아. 몇 주가 걸리던 몇 달이, 몇 년이 걸리던 당신이 제안하는 방법대로 다 할게. 그렇게 다 해보고도 당신 마음이 안 풀린다면 그때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할게. 마지막으로 한번 만 더 나 믿어 주라."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지금까지 준 기회들로도 부족해? 그동안 내가 그렇게 얘기했을 땐 변하지 않고 이제 와서 나한테 더 바라는 거야? 내가 이렇게 된걸로도 부족해? 난 그만할 거야. 당신 돈 없으면 못 살까 봐? 그런 걱정은 마. 당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일 잘 알잖아. 그래서 여태껏 그랬던 거고. 내가 아무리 아프더라도  ♥♥하고 당신 없는 빈자리 전혀 못 느끼게 살 거니까 걱정 말고 짐 싸. 이제 정말 끝이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

"여보, 없는 사람처럼 있을게.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고 당신 거실에 있으면 그냥 조용히 방에 있을게. 숨소리 한 번 크게 낼게. 그냥 투명 인간처럼 있을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말할게. 아니, 행동으로 보여줄게. 여보... 제발. 당신하고 ♥♥이 없으면 난 독거노인 되고 말 거야. 고독 사해도 아무도 모를 거야. 여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줘."





오늘 2022년 4월 10일,

이혼과 별거에 대한 구제적인 얘기를 처음 꺼낸 날로부터 5개월의 시간이 흘러갔다.

*결자해지(結者解之)-매듭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한다.


기가 막힌 시간이 우리를 관통해 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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