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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Mar 31. 2022

헤어지자고 말했다

최후통첩

이삿날이 결국 D-day가 되고 말았다.


이사는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됐다.

워낙 능력 있는 이사팀을 만나기도 한 데다 딸이 내가 아프다는 얘기를 여러 번 해 놓기도 한에 청소까지 끝마친 시간이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때까지 차에 누워 있던 나를 데리러 내려온 딸에게 고생했다는 얘기를 해주곤 호텔링 한 콩이와 리아를 데리고 오라고 얘기를 한 후 천천히 새 집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방을 정리하고 있던 남편을 거실로 불러 얘기를 시작했다..


"♥♥ 아빠.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내가 어디까지 참아주면 될까?

아니, 언제까지 참아주면 되겠어?

당신이 일 하느라 힘든 거 알아서 내가 많이 아파도 웬만한 건 ♥♥이가 다 알아서 하지. 자기 몸도 아픈데 내색은 고사하고 림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 회사일도 돕고 강아지들 케어도 다 하고 내 간병도 하고,... 심지어는 모든 수술, 입, 퇴원 보호자도 당신이 아니라 이야. 

내가 남편이 없는 과부도 아니고 왜 자식한테 다 기대야 돼? 집안 가장이 나서야 할 때 뭐가 됐든 그냥 내 편이 돼서 뭐든지 알아서 해주는 건 난 평생 꿈도 꾸면 안 되는 거야?

응급실에 가서 사경을 헤매는데 만지면 안 되는 팔, 다리 (CRPS) 툴고 건방진 인턴이 함부로 만져서 모르핀까지 투여하게 됐을 때도 당신은 그림처럼 앉아 있고 조심해 달라고 한소리 하는 것도 아픈 내가 해야 엄마, 아빠하고 함께 사는 집 이사하는데 한 사람 남으라는 것도 아빠 놔두고 불치병 걸린 딸더러 지키고 서있으라고 하면 그럼 도대체 당신은 이 집에서 뭐 하는 사람인데?

그냥 돈만 벌어다 주는 사람?

그 돈 나도 아프기 전까지 내내 벌었고. 있는 큰돈은 다 친정에서 해 주셨. 심지병원비 여태껏 친정에해주시고. 는 말할 것도 없고 손녀♥♥까지.

대체 당신하고 내가 왜 같이 살아야 될까?

내가 참아야 는 이유 혹시 당신은 알?

아니면  달라지겠다고 약속한 게 몇 번인지 기억은 나?"

"아니... 내가 가구나 물건들 어디에 넣어야 되는지 잘 모르니까 ♥♥이 한테 있으라고 한 거지. 내가 있어봐야 별 도움도 안 될 거 같고.  그리고 그때 응급실에서 그런 일이 있었나? 암튼 그건 미안해. 그리고 진짜 병원비를 내 돈으로 하나도 안 낸다고? 입원비도?"


얼씨구!! 그럼 그렇지. 남편이 다년간 연마한 기술과 말솜씨, 살짝의 웃음이 섞인 그 특유의 말투로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26년간 차곡차곡 쌓이다 못해 내 몸을 갉아먹고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중증 기저질환자의 심연의 분노를 터치하는 단어를 내뱉고야 말았다.

"내 돈"


이제야 비로소 내가 준비하고 리허설까지 마친 우리의 'Last Fight'의 장이 열렸다.


나는 나와 나의 새끼들을 위해 양손의 붕대를 힘 있게 돌려 감고 링 위로 뛰쳐 올라갔다.




"♥♥이를 혼자 두고 내려간다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거였지. 당신이 가구나 여타 물건의 자리를 몰라서 내려간다고 한 거라면 함께 남아서 여기저기서 불러댈 ♥♥이도 도와주고 창고랑 알파룸 물건 정리라도 돕고 생활 지원센터(관리 사무소)에 가서 세대 입주 신고도 하고 주차카드도 받고 할 일이야 천 지지. 이삿날은 하루고 그런 것들 미뤄두면 애가 혼자 다 해야 하잖아."

"그럼 이렇게 짜증 낼 게 니라 그렇게 하라고 미리미리 얘기해 주면 좋잖아."


남편이 짜증을 벌컥 내며 내게 말했다.

그냥 피곤하고 지쳤다. 내가 중환자인 걸 떠 지난 두 달간 침대에서 화장실을 기어 다니기만 했었다는 걸 그새 남편은 잊었나 보다.

아니, 나를 아는 어느 누구보다 내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제일 첫 번째 인물이 남편이란 걸 잊은 내 잘못이 크다. 그래. 또 내 잘못이구나.

그런데 이제 잘못 좀 덜하면서 바른 어른이로 살아보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남편 일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 내가 못 챙기고 아이랑 당신이랑 이사한 게 몇 번짼데 아직도 이삿날 당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아픈 내가, 아님 이사에 정신없는 딸이 애기한테 타이르듯 조목조목 알려줘야 돼? 휴대폰으로 '이삿날 해야 할 일' 하고 검색만 해도 뭘 해야 하는지 다 나올 텐데...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당신한테 부탁도 안 했어. 그냥 미리 좀 신경 쓰고 챙겨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구나 당신은. 아예 그럴 생각이 없든지."


난 더 이상 참을 생각이 없었다.

딸과도 미리 얘기를 나누었다. 대장염을 앓는 나를 보며 딸은 다시 한번 크게 위기감을 느꼈다고 얘기했다.

내가 큰 병을 앓게 되고 독한 약들을 여러 가지 먹게 되면서 사실 보통 사람들이 앓는 감기나 인후염, 독감, 장염 같은 외부의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해 전염되는 병에 의외로 자주 걸린 적이 없었다.

외출이 거의 없이 집에 만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외부의 위험에 최소한 노출됨으로  인해  적당한 면역 체계가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다 못해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기 한 번을 물리지 않아 큰 병을 앓는 환자의 소소한 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장염으로 인해 두 달간 사경을 헤매다시피 하는 나를 보며 다시 한번 죽음에 엄마를 잃을까 전전 긍긍하게 된 딸이었다.

그런  아빠를 끔찍하게 미워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영원히 내가 남편과 헤어지는 것이 아이의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결심하게 만들었다. 딸에게 자신을 낳은 부모를 미워하는 죄책감을 더 이상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자살 사고 이후에 당신한테 얘기했었지.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그리고 가장으로서 노력하라고. 런데 혹시 나가 역시나 라고. 당신은 절대 변하지 않더라.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옹고집만 늘어서 아집만 잔뜩 늘어난 꼰대 중의 꼰대가 돼버렸어. 그래서 이제 그만할 거야. 당신이 나한테 몹쓸 짓 하고 사과도 제대로 안 했을 때 진작 그만했어야 했는데. 내가 포기가 쉽지 않아서 실수했어"

"도대체 언제까지 그 얘기를 할 건데? 내가 사과했잖아. 내 기억엔 수십 번도 더 한 것 같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당신 기억 상실이라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고?".

"내가 아무리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고 잃어버린 기억이 많다고 해도 당신이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면 당신이 한 잘못 자체를 잊었을 거야. 난 그런 사람이니까. 아! 더 얘기할 거 없어. 확인도 끝났고. 난 더 이상 당신하고 안 살 거야. 이제 제발 이혼하자." 

"그놈의 이혼, 이혼, 이혼!! 하자. 해. 한번 실수 한걸 가지고 평생 사과를 하라고 하네마네. 나도 지겨워. 이혼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던 내 가정이 이렇게 박살이 난다는 생각에 살과 뼈가 찢어지는 통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또다시 살 수 있을 거 같지 않다는 지독한 패배감이 순간 가슴으로 젖어들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타오르며 숨이 쉬어 지질 않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베란다의 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14층 아래 컴컴한 어둠 속을 내려다보았다. 11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베란다 난간 위에 올라서서 창틀에 만 매달려 허공 위에 서서 죽음으로 몰아가는 악몽 같은 내 현실과 그래도 살아서 지켜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시나무 떨듯 떨며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마의 시간 동안 그렇게 매달려 있었는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갑자기 몰아치는 찬바람에 몸이 휘청거림을 느끼고서야 무서움 증이 돋아났다.

찬바람에 잔뜩 굳어 통증이 시작된 리를 덜덜 떨며 집안으로 다시 뒷걸음쳐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진통제를 물 없이 삼켜 먹으며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다시 남편 방으로 걸어갔다.


"짐 풀지 마"

"뭐라고? 당신 왜 그래. 울었어? 아!!. 내가 미안해. 당신이 하도 뭐라고 하니까 짜증 나서 홧김에 이혼하자고 한 거지. 미안해. 미안해."

"아니. 미안하다고 하지 마.  이상 당신 얘기 듣고 싶지 않아. 우리 얘기는 할 만큼 했어. 당신 며칠 지낼 옷 챙겨. 세면도구 하고."

"아! 왜.... 여보?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랑 애기들 오기 전에 얘기할 거니까 잘 들어. 이혼이든 별거든 당신 못 보겠어. 벌써 몇 달 전부터 당신 퇴근하면 불안장애 약부터 먹었어. 숨이 막혔거든. 더 이상은 못해. 죽고 싶어. 그러니까 나가. 나가서 집부터 해. 원룸이든 오피스텔이든 알아서 해. 지금 이사하고 돈 여유 있으니까 집 구할 돈 보내줄게. 그리고 지금 짐 싸서 나가. 남은 건 집 구하면 실어 보낼 테니까 호텔이나 모텔이나 어디든지 가. 이제 안녕 하자. 이혼은 우선 당신 나가고 천천히 얘기해. 그 대신 오늘 반드시 나가."

"여보. 내가 가긴 어딜 가. 내가 갈 데가 어딨어. 정말 미안해. 화 풀어."

"그래? 그럼 내가 나갈까? ♥♥이랑 아기들 다 데리고 나갈 거야. 모르진 않았지? 설마 이 밤중에 내가 나가길 바라? 그런 거야? 좋아. 그럼 내가 나가지 뭐."


다리에 심하게 생긴 통증이 어느새 등을 타고 올라 팔까지 번져 온몸을 덜덜 떨며 남편에게 마지막 선고를 전하고 있을 때 '삑삑 삑삑_비빅'

현관문의 비밀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가들이 엄마와 아빠가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의 새 보금자리로 뛰어 들어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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