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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May 08. 2022

그들이 아는 난 자리 내가 아는 든 자리 1

딸의 채움으로 도드라진 내 빈자리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말씀을 공경하고 예절 바른 것을 상 당연한 일이라 배우고 몸에 익혀 살던 나였지만 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옛말 그른 것 없다'는 속 깊이 체감하고 있다. 비록 짧은 견식이지만 선조들의 깊은 지혜에 탄복하며 살고 있는 요즘이다. 


 마음을 10년만 더 먼저 깨우쳤더라면 내게 생길 비극과 고통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어떠랴.

안타깝다 생각하면 한창때의 10년의 세월이 아깝기 그지없지만 안달복달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이 내게 더 편안한 일이 될 듯싶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 내가 살길이 아닐까?




결혼 생활에 얽힌 것들을 정리하면서 아물지 않은 옛이야기, 옛 상처가 떠 오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우리가 살던 곳에서 사를 나오던 날 내게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일들 말고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딸에게 들었다.


*결혼, 사랑으로만 하아니더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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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남편이 내게 보인 실망스럽다 못해 절망에 가까운 모습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 나 스스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친 여자처럼 돼버린 동생, 또는 언니 그리고 자식인 나를 오로지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어린 (조카, 손녀) 에게만 맡겨두고 원가족인 친정식구들이 나 몰라라 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을 두고 나를 괴롭혔다.


진짜 미친 것이 나인지, 아니면 그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러 이가 부서지고 목이 쉬어나가도 이 모든 걸 감당하는 게 오로지 딸 뿐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부모와 가족의 개념은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어도 나의 결백을 믿어주고 설령 살인을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써 온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끝까지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은 오직 가족뿐일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내 원가족은 내 실수가 아님에도 내게 책임을 묻고 나를 밀어내어 몇 년 동안 아무도 날 찾지 않는 벌을 주었고 남편은 자신의 잘못 조차 인정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기만했.


셀 수 없이 많은 병과 참을 수 없이 아픈 고통 중에도 나는 기다렸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적어가며 매달렸다.

달변가였던 내가 통증과 독한 약에 말을 잃어 글을 쓰며 견디고 버텼다. 그렇게 견디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딸에게 몇 번이나 다짐받듯  건넨 말이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어. 지금은 불편해도 아닌 척 괜찮은 척 외면하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없는 빈자리, 내가 난 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거야. 그때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고. 분명히 그런 때가 올 거야."


아프고 원통한 마음에 무너지고 망가져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되뇌고 되뇌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고서야 외롭게 죽도록 아프고 고독하게 이를 악무는 투병생활을 견뎌낼 수 있게 됐다.

마지막 최후의 그때가 되면 어떻게 행동할진 나도 짐작하진 못했지만 나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었다. 




이해할 수 없다 말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이해가 가능한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니 있는 그대로 써보려 한다.

여전히 아무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아이의 희귀 난치병을 발견하게 되는 이 생겼다. 그때 아이가 이모와 다시 처음 연락을 하게 됐었다고 얘기를 했다. ♥♥이는 친정의 첫 손주였고 친정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까지 희귀 난치 질환을 앓게 된 후로 아이는 가끔씩 주말에 외가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모를 만나고 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족과 왕래를 안 하고 형제, 자매와 인연을 끊었다 해서  ♥♥이에게 까지 억지로 강요하며 만나지 못하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 후로도 계속해서 아이는 외갓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가 직장 다닐 때 할머니가 키워주셨는데 더 늙으시기 전에 자주, 많이 뵈러 다려고. 그렇다고 엄마한테 모질게 한 거 잊은 거 아니야. 그냥 내가 후회 안 하려고. 엄마 속상하지 않도록 오래 있다 오지 않을게"


♥♥이는 외가 에서의 일을 내게 옮기지도 않았고 내 얘기를 외가에 시시콜콜 옮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적당히 싹싹하고 다정하게, 갈 때마다 구하기 힘든 맛있는 것이나 제철 과일 중 제일 좋은 것들, 뭐가 됐든 노인 두 분이 기뻐할 것들을 준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왔다.

그 행복한 시간 속에

♥♥이의 싹싹한 다정함이, 능청스러운 것 같은 애교가, 무엇이든 잘 먹는 식성이, 빈 손으로 찾아가지 않는 예절이, 모든 질문에 똑 부러지는 대답이, 무엇보다 날 닮은듯한 모든 행동들이

다시 내 난 자리를 크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이가 아픈 이후로 가뭄에 콩 나듯 이어지던 나와 부모님과의 통화에 엄마, 아버지의 아쉬움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거리가 먼 무뚝뚝하고 쌀쌀맞은 목소리(제가요)로 몇 마디만 나누던 나와의 전화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자리를 이제는 확실히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연세도 많아지고 내 병 또한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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