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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오순 Sep 23. 2020

우리 동네 음악회

"Oh Danny boy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아일랜드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오 대니보이'의 첫대목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2003년 3월 아일랜드의 클래식 연주단체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아이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Irish Chamber Orchestra)가 그들이다. '오 대니보이'에는 그들과 함께 했던 가슴 뛰는 추억이 담겨 있다.


아시아 순회공연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아이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그 해 서울과 대전에서 두 개의 공식적인 공연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경기도 양평의 서종면에 있는 한 마을에서 비공식적인 연주회를 열게 되었다. 당시 그 공연의 기획자로 일을 했었는데, 처음엔 전체 일정에 비공식적인 연주회 일정을 잡기도 어려웠고, 출연료와 숙소 문제로 성사 여부조차 불투명했다. 그러나 시골 마을 연주회에 대해서 스무 명이나 되는 단원들이 뒤늦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기 때문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음악회를 여는 곳은 한마디로 예술인 마을이었다.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30여 회가 넘게 매달 음악회를 열고 있었는데 인연이 닿아서 아일랜드의 실내악단이 이 마을을 찾게 된 것이다. 마을이 만들어지고 난 후 벽안의 외국인이 한꺼번에 스무 명이나 찾아오기는 그때가 처음이란다.

공연 하루 전날 조마조마해하면서 마을로 진입하는데 입구에서부터 마을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영어가 아닌 한글의 "환 아이리쉬챔버오케스트라 영"이라는 흰색 플래카드가 마을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단원들한테 설명을 해줬더니 모두 입이 벌어졌다. 호기심 많은 젊은 단원들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이건 뭐냐, 저건 뭐냐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연주는 하루를 쉬고 그다음 날 오후에 진행하기로 약속을 한 터였다. 여장을 풀고 마을 주민들이 준비한 환영회 자리로 이동을 했다. 다들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들이었다.

한국식 온돌방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바닥에 앉은 모습들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그럼에도 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지고 술잔이 오가면서 분위기는 출렁출렁, 점점 더 무르익어 갔다. 여기저기에서 상추는 이렇게 싸 먹는 거다, 젓가락은 이렇게 사용하는 거다, 손짓과 몸짓이 몹시 분주했다. 불콰해진 모습으로 단원들에게 한국식 주도(酒道)를 가르치는 분도 있었다.

다음날 점심으로 제공된 산채비빔밥에 단원들은 "판타스틱!"을 연발했다. 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우리나라 산채비빔밥은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식단이 아니던가. 김치를 처음 먹어본다고, 고추장을 처음 먹어본다고, 된장찌개를 처음 먹어본다고, 그래도 맛있다고, 다들 즐거워했다. 고추장이 입에 맞았던지 한국 공연 후 중국으로 떠나는 단원들의 짐에서 빨간색 플라스틱 고추장 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어 시간의 리허설을 위해 연주 장소로 미리 움직였다. 15cm 높이의 단상과 약간의 조명시설, 그리고 200개의 플라스틱으로 된 간이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단원들이 단상에 올라갔더니 무대가 꽉 차보였다. 활 긋는 소리가 몇 번 나고 리허설은 바로 시작되었다.

공연이 시작될 저녁 7시가 가까워오자 입구가 술렁술렁 시끄럽기 시작했다. 조용히 하라는 소리, 줄을 서라는 소리, 비키라는 소리로 밖은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어른은 1,000원, 아이들은 500원의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전석 유료 음악회였다.


사람들이 천천히 입장하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좌석 200개가 모두 차 버렸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서 나를 포함해 관계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입장하려는 사람들의 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전체 좌석을 뒤로 밀고 공간이 남는 곳으로 의자를 움직여 열이나 줄 맞출 필요 없이 앉기로 했다. 아이들은 무조건 앞으로 나와 바닥에 앉고 안을 수 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안고 음악회를 감상하기로 했다. 장소가 비좁아 창문의 난간에까지 사람들이 위험하게 매달렸다. 복도 바깥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복도와 공연장 사이의 창문은 모두 열어 놓았다. 음악회는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200석 규모의 공연장에 그날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입장을 했다.

무대 위의 연주자들은 몹시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단상 바로 아래에서 와글와글 100명은 좋이 넘는 꼬마들이 의자도 아닌 바닥에 앉아 연주를 들으려는 모습은 내게도 진풍경이었다. 드디어 음악회가 시작되었다. 비발디의 '사계' 운율이 창문을 타고 지붕을 타고 온 마을에 흘러넘쳤다. 3월도 중순인데 봄과 여름이, 가을과 또 겨울이 한꺼번에 이 마을을 찾아왔다. 어른들은 음악에 취했고 아이들은 잠에 취했다. 4악장이 지루했는지 꼬마들은 '여름'이 찾아올 때부터 벌써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일부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어른들의 "쉿-!", "쉿-!" 소리가 나자 결국 악장 중간에 지휘자가 연주를 멈췄다. "노 프라브럼!" 잔뜩 긴장한 객석을 향해 날아온 거장의 한 마디였다.

연주가 끝났는데도 사람들은 떠날 줄 모르고 계속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에 자다 깬 아이들은 더 큰 몸짓으로 합세를 했다. 연주자들은 그 좁은 무대 위에서 객석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가 또 고개를 숙이는 일을 반복했다. 아무도 음악회가 끝났다고 박수를 끊지 못했고 계속되는 박수소리는 앙코르 연주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언제 끝날 줄 모르던 긴 박수가 멈추면서 음악회가 끝이 났다.
 
간단한 저녁식사로 예상했던 뒤풀이는 동네 음악회의 2부 순서가 되고 말았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자 흥이 난 단원들이 가방에서 악기를 꺼내 아일랜드의 민속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비올라가 나왔고 만돌린도 나왔다. 연주회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북 비슷한 악기가 등장하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단원 몇 명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음악에 맞춰 주민들과 서로 팔을 걸며 방안을 빙- 돌기 시작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방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어났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팔을 엇갈려 돌면서 다들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아리랑'이 독창으로, 또 합창으로 흘렀고, '오 대니보이'도 독창으로, 또 합창으로 흘렀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리랑’을 배웠고, 한국 사람들은 ‘오 대니보이’를 배웠다.
 
축제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고, 꼭 다시 한국에 오겠다면서 내게 아름다운 추억 하나 달랑 남겨두고 그들은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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