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선택이 필요했다. 늘 내가 선택한 게 최선일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선택한 후에는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시간에 좀더 나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 안되면 다시 시작하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일본에서 이미 시작한 박사과정을 영국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사회학과에서 이번엔 지리학과이다. 문화를 통한 국제개발이 내 관심분야이니 그 공부가 가능한 곳이면 학과명은 상관이 없었다.
엑세터 대학(University of Exeter)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솔직히 장학금에 흔들렸다. 외국인 유학생이, 그것도 인문분야로 영국에서 박사과정 공부하면서 장학금 받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학교에서 장학금을 제공한다는 건 내 연구를 시시하게 취급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향후 내 지도교수가 될 폴 클로크(Paul Cloke) 선생의 적극성에 다른 학교는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 선생이 영국의 한 기관으로부터 펠로우십 받을 때의 프로필과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걸 보고 아예 마음을 굳혔다. 학교 프로필 사진에 슈렉 탈을 쓴 사람인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이 교수 참 재미있는 분이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펠로우십 프로필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폴은 누구누구와 결혼했고, 두 아이가 있다. 그의 가족은 그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하며 그가 이제까지 이루어놓은 일들의 빼놓을 수 없는 원천이다. 연구를 하지 않을 때는 기타를 연주하거나 축구 클럽을 응원하며, 모험 가득한 장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도 하는, 그리고 그가 다니는 작은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제한된 지면에 프로필을 적어야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이력을 과대포장하기 바쁜데 평범하기 짝이없는 프로필과 푸근하게 웃고 있는 아저씨 같은 이 교수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물론 다른 어떤 학교보다 최상의 연구환경을 제공할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 판단이 옳았던 것 같다. 과정을 시작하고 6개월로 접어든 요즘 연구주제를 바꾸는 학생들을 종종 만난다. 6개월 동안 해온 일을 다 다시해야한다는 의미였다. 지도교수와 맞지 않아 아예 만나지 않거나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학생들도 많다. 특히 유명한 교수의 경우 연구 이외의 일들이 많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면담약속을 취소하거나 학생의 연구가 메인이 아니라 본인의 연구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유명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폴 선생은 영국의 지리학과에서 알아주는 분이고 굉장히 성실한 분이시다. 학생은 지도교수가 학생을 잘 지도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야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생은 그 분야의 전문가인 지도교수에게 아낌없이 지도편달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한다고도 생각한다. 지도교수에 대해 불만이 많은 학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양쪽 다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인 것 같다. 지도교수가 적당히 자유와 부담을 주면서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 학생들의 경우 학기 중에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지도교수를 만난다고 하는데 나는 매주 만나 한 시간 정도 내가 하고 있는 연구, 문제점, 다음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상의한다.
다른 사람들은 지도교수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일본에서도 아버지 같은 지도교수를 만나 연구는 물론 외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말도 다르고, 교수법도 다르지만 사람한테 전해지는 마음은 다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지도교수가 신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에게 의존할 수는 없지만 작은 것도 상의하려고 하고 공부를 하다 뭔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힘든 부분이 나오면 과감히 연락을 취한다. 기숙사 문제가 해결안될 때도 그랬고,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너무 비싸니 어쩌면 좋겠느냐, 이런 시시콜콜한 것도 상의한다. 동기들이 좀 심한 것 아니냐고 나를 놀리는데 내 지도교수는 첫 면담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지도교수의 역할은 학생이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단계라도 좋으니 네가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나는 기쁜 마음으로 관여를 할 테니 기탄없이 이야기를 해라. 네가 커피를 연구하니 행복한 마음으로 난 미팅 때마다 커피를 살 것이고, 한 곳에서만 커피를 마시면 지루하니 학교 안의 모든 카페들을 돌아다니며 커피를 마셔보자고 그러셨다. 그래서 엑세터 대학 내에서 카페투어를 하며 커피투어리즘을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지 말고 근교에 잠깐 여행을 다녀오거나 취미로 운동 같은 걸 하면 어떻겠느냐 여러번 말씀하셨는데 몸으로 하는 운동을 하나 시작해볼까 그런다. 폴 선생은 항상 나를 만나면 오늘 행복하니, 라고 꼭 물어보신다. 그리고는 헤어질때 Happy Ohsoon!!Keep smiling!!을 주문하시는데 학위가 끝날 때까지 내가 행복하게, 웃으면서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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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6개월쯤 지났을 때 지도교수인 폴 선생에 대해 쓴 글이다. 무사히 박사과정을 마치고 에티오피아 커피 투어리즘(Coffee Tourism in Ethiopia)으로 1호 박사가 되기까지 폴 선생은 한결같았다. 논문을 시작하기 전 글을 쓰는데 예열시간이 오래 걸리는 나를 본인 방식으로 격려해주셨고 처음으로 서문을 써서 가져갔을 때 “Absolutely Excellent!”라는 피드백으로 더 열심히 하지않을 수 없도록 크게 칭찬해주셨다. 학위를 마치고도 추천서가 필요하면 당장 내일 필요한데 오늘 부탁드려도 기꺼이 보내주셨다.
3일전 폴 선생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올 봄에는 내가 좋아하는 분들, 내가 크게 은혜를 입어 살면서 많이 갚아야하는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그만 게으름 피우고 지하실에서 나와 세상에 도움되는 일을 많이 하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이외수 선생님 돌아가시고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폴 선생님의 갑작스런 소천 소식을 들으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반성과 움직임이 너무 약해 하늘이 시그널을 한 번 더 준 느낌이다.
폴 선생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R.I.P.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PaulCloke #폴선생님 #HumanGe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