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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크레타에 가다 (1탄)

by 윤오순

2013년 그리스의 크레타(Crete)에 갈 때 내가 가진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학회가 끝나고 짧은 여행일정이 있었지만 상황봐서 그냥 호텔에서 쉬어야지 하는 생각도 있어 깐깐하게 여행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내에 정보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건 내 꿈이었고, 다행히 옆자리에 앉은 부부 덕분에 꼭 챙겨먹을 음식목록은 만들 수 있었다. 대신 난 그 사람들이 몇 년 간 여행하면서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다 봐줘야 했고, 중간중간 자식자랑, 사위자랑도 다 들어줘야 했다.

막상 도착한 크레타의 수도 헤라클리온(Heraklion)은 좀 황량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어디로 가서 허기를 채우나 둘러 보다 어느 골목에 접어 들었다. 그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이 딱 한 군데 뿐이어서 그 앞에서 얼쩡거렸다. 나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말고는 아는 그리스어가 없었고, 식당 주인도 할 줄 아는 영어가 없는 눈치인데 이상하게 그곳이 끌려 아무 데나 자리를 잡았다. 여사장님과 아들이 번갈아가며 메뉴판을 가지고 오는데 당황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앉았다 그냥 일어나기도 뭐해 기내에서 부부에게 들었던 크레타 음식이름을 몇 개 들먹였더니 두 사람들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테이블 한가득 음식이 나왔는데 돼지고기 요리도 있었고(밥이 있으면 맛있게 먹었을 음식인데 그냥 먹기에는 너무 짰다.), 달팽이 요리도 나왔다. 빵 요리도 있었고, 샐러드 요리도 있었다. 여사장님이 샐러드, 라고 직접 물어보셔서 반가운 마음에 시켰는데 큰 볼 한가득 크레타 스타일 샐러드가 나왔다. 와인도 한 잔 시켰는데 유리주전자에 한가득 담아 오셨다.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걸 다 먹을 수는 없었다.

옆에 뒤늦게 자리잡은 프랑스인 그룹도 나랑 사정이 비슷해 보여 내 자리에 온 음식들을 덜어 그 자리로 넘겼고, 그 사람들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거절하는 내게 자기네가 주문한 음식들을 큰 접시에 담아 보내줬다. 환할 때 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사를 끝냈을 때쯤 밖은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주섬주섬 계산을 하려고 했더니 여사장님이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이름만 들어 본 유명한 그리스의 가정식 디저트가 연이어 나왔다. 메인 요리는 배가 불러 다 못 먹었는데 서너 가지의 달달한 디저트는 다 먹을 수 있었다. 계산할 즈음 여사장님 남편이 어딘가에서 오셨고, 짧은 영어로 네가 여기 문화를 잘 몰라 이것저것 많이 시킨 것 같은데 남김없이 다 먹은 샐러드 값만 내고, 나머지 음식은 내 집에 온 손님한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겠다고 했다. 내가 와인도 시켰고, 디저트도 너무 맛있게 먹어서 꼭 계산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걸로 충분하다면서 끝내 받지 않으셨다. 크레타에 일주일 머물면서 그 집을 자주 갈 기회는 없었다. 학회 장소가 호텔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식사 일정이 대부분 다른 곳에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날 비행기를 타기 전 시간이 남아 그 집에 잠깐 들렀다. 그리스 스타일 커피와 디저트를 대접받았다. 내가 커피 투어리즘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릭 커피(Greek Coffee)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여사장님이 친히 부엌으로 초청을 해주셔서 '레알' 그릭커피를 구경해볼 수 있었다. 다시 크레타에 올 기회가 있으면 그 식당에 들르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 있는 날이 내 인생에 또 있을까 싶다. 그리스 샐러드를 만들려고 슈퍼에서 두툼한 페타치즈를 살 때마다 그 골목식당 가족들이 생각난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으니 그렇게 우연히 우린 만났을 테지.

크레타에서처럼 아무 준비없이도 그렇게 잘 챙겨먹고 온 여행이 있는 반면에 준비를 잘 하고도 정말 쫄쫄 굶는 여행도 있으니 여행엔 정답이 없다는 게 정답이 아닐까.

사진: https://mypathintheworld.com/4-days-crete-itine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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