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주 먼 옛날(?) 한국에서 클래식 공연기획자로 일하려면 멀티플레이어가 되지 않으면 안되던 시절이 있었다.
공연 전에 연주단과 외국어(대개는 영어)로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공연 관련 정보도 많이 얻어야 하고, 보도자료도 부지런히 써서 언론사에 보내야 하고, 공연기간에는 연주단과 같이 움직여야 하니 여행 가이드가 따로 없고, 한국 전통음식 혹은 한국 고유의 무엇(?)을 원하는 외국인 연주자들 앞에서는 한국문화 홍보 전문가 혹은 한국문화 해설사가 되기도 한다. 공연 당일에는 무대 체크도 해야 하고, 연주자들의 드레스 리허설도 도와야 하고, 당일 객석에 VIP들이 올 예정이면 그 준비도 따로 해야 하고, 공연 후 사인회라도 있으면 공연장 주차장에서 로비까지 음반도 날라야 하고, 연주자들은 대개 공연 전에 식사를 하지 않고 공연이 끝난 후 호텔로 이동하면 그때부터 먹기 시작하는데 그런 연주자들을 위해 자정에도 음식이 들어가는 거대한 위를 준비해야 한다. 다양한 국적의 풀오케스트라단 단원 및 관계자들을 외국 공항의 체크인 카운터 앞에 모아놓고 수속을 마치고 나면 그냥 딱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각설하고.
그렇게 아주 먼 옛날(?) 클래식 공연기획자로 일한 덕분에 유명한 연주자들을 가까이서 만날 기회가 많았다. 비발디의 '사계(The Four Seasons)' 연주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연주그룹 이 무지치 (I Musici)와 순회공연을 할 때였다. 연주단 리더와 챔발로 연주자가 부부였는데 창단할 때부터 그때까지 늘 공연을 함께 했다는 어매이징한 사연이 있었다. 이 무지치 계약서에는 이 부부가 함께 머물 수 있는 호텔 룸 제공이 반드시 포함되는데 그 조항이 50년 이상 유지되고 있었다.
분장실에 항상 연주자들을 위한 다과를 준비하는 게 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는데 그때 챔발로 연주자가 내게 따로 얼 그레이 차(Earl Grey tea)를 부탁했다. 서울 포함 8개 도시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 정도 차는 지방에도 다 있는 줄 알았고, 이동 중의 부탁이라 다음 도시에 도착하면 준비하겠다고 편하게 대답을 했다. 혹 못구하게 되더라도 없다고하고 다른 차를 주면 연주자가 그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 줄 아는, 상당히 무식한 공연기획자였다. 지방의 대형 백화점에서도 얼 그레이 차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에 왔으니 녹차나 다른 한국 전통차는 어떠냐는 내 꼬임에도 연주자가 넘어가지 않는 바람에 결국 서울에서 내려오는 직원 편에 차를 부탁해야했다. 당시 1월 공연이었는데 얼 그레이 차 한 박스를 찾아 추운 날 광주 시내를 택시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헤맨 기억이 난다. 지금도 얼 그레이 차를 마실 때면 그때 개고생했던 일과 이 무지치 생각이 많이 난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사진: 1962년 이스라엘 방문 당시 이 무지치 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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