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없는 새끼”
처음으로 너에게 욕을 들었던 그날 이후에 한 번도 네 소식을 듣지 못했다. 잘 지내는지, 어느 대학을 갔는지, 요즘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소식하나 없냐.
친구들은 내가 오지랖도 넓고, 주변 눈치를 많이 본다고 하지만 난 생각보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다. 오죽하면 제일 친하다고 생각한 너마저도 내가 네 눈을 쳐다본 적이 별로 없다며 서운해했을까. 그리고 난 유독 눈치가 없었다. 나를 향했던 미묘한 눈빛도, 우리가 서로 주고받았던 의미심장한 말들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자각하지 못했으니 기억을 못 하는 것은 당연한가?). 이를 처음 깨달았을 때는 너와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싸움이 났을 때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싸움의 원인을 몰랐다. 지금은 네가 어디서 뭐하는지도 모르고, 그 흔한 ‘반 친구’이라고 정의 내리지도 못할, 그런 좋지 못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최근에 들어서야 너와의 관계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팔꿈치가 맞닿았을 때 떼고 싶지 않았던 수업시간이라던지, 네가 좋아해서 매주 빨래를 하며 갖고 다녔던 털 담요라던지. 난 스킨십이 아직도 어색하고, 열이 많아서 담요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땐 아니었나 보다.
보슈와 이민경 작가의 <피리 부는 여자들>을 읽고서야 다시 보이는 관계들이 너무 많다. 너와의 그 내밀했던 관계도, 너무나 소중한 모든 여성들과의 관계도. 주변에서 가끔 보이는 섬세한 감정들이 오가는 상황도 이제 너무 잘 보인다. 친구들이 고민상담도 꽤 부탁하고, 묘한 기류가 오가는 상황에 어쩌다 함께 있게되면 그들을 위해 슬쩍 자리를 피해줄 정도로 눈치가 많이 늘었다(네가 들으면 웃을 것 같지만). 페미니즘을 만나고, 서한나를 만나고, 이민경을 만나고, 권사랑을 만나고. 그리고 지금의 내 친구들을 만나면서,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그 감정들을 서서히 인정해가고 있다. 끝이 없는 다양성을, 한 없는 자유로움을. 그리고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너의 생각이 났다는 사실까지도. 너에게도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5년 전 우리가 이 책을 같이 읽을 수 있었다면, 지금쯤 우린 가끔 전화를 하는 사이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아직도 문득 네 생각이 난다.
#피리 부는 여자들 #보슈 #서한나 #권사랑 #이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