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5시

by 네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5월 중순. 첫 상담.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으신 여성분 이셨다. 밝지만 편안한 분위기의 상담실. 상담 전 사전 설문지를 작성하고 간단한 테스트를 했다. 아마 나의 과거, 현재 상태, 성향 등을 파악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결과를 토대로 한 몇 가지 질문들. 대부분은 내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다. 차분히 내 이야기만 했다. 약간은 방어적으로. 수동적으로. 나는 정말 일반적인, 정규분포의 정가운데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반응도 굉장히 전형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단순히 이야기만 하는데도 약간의 현기증과 피로함을 느꼈다. 그만큼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씩 편안함이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 번 상담을 하기로 했다. 매주 목요일 5시. 처음 세 번 정도는 그렇게 내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가정사, 내 업무 이력, 직전의 내 상황, 현재의 내 상태. 꺼내기 싫은 과거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다 한 것은 아니었다. 치부까지 드러낼 정도로 내 상태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한 주 한 주 내 이야기를 풀어냈다.


신기하게도 일주일에 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정말 기다려졌다. 특별히 무엇을 하라고 권유한 것도 없다.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신 그분은 그냥 내 상태가 현재 이렇다 정도의 정보만 주셨다. 나는 상담사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딱 그 정도까지만 들었다. 아마 내가 이야기를 더 하도록 상담사께서 말을 아끼신 것 같다. 그렇게 흐른 한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느껴졌다. 두 번, 세 번, 네 번. 패턴의 차이 없이 질문과 답. 나는 답을 하면서 울컥하기도 했고, 혼자 웃기도 했다. 덤덤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조금 더 자주, 약간 더 길게 시간을 갖고 싶었다.

image.png <출처 : Unsplash>


지적인 만족을 위한 공부와 수험공부는 완전히 다르다. 나를 채우는 공부는 재밌다. 범위도 내 마음대로, 깊이도 그냥 내가 정하면 된다. 수험 공부는 붙기 위한 공부다. 필요 이상으로 더 넓히거나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금기다.


화학과 생물은 가끔 내 지적 공허함을 채워주는 좋은 소재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엔 과학도 등급이 있었다. 물리를 포기하면 화학 하면 되고, 화학 안되면 생물이나 지구과학하면 되고. 본고사로 물리를 선택했으니 화학과 생물은 금방 할 수 있다는 이 지독히도 머저리 같은 유치한 마인드. 많지 않은 에너지였지만 편입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도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아이템이었다. 아내도 적극적이었다. 내가 안 돼도 나중에 아이들에게 혹시 필요할지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혹시 아내의 큰 뜻은 이것이었나.


그러나 편입 공부는 지적 호기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는 용납할 수 없다.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화학과 생물에서 나름 인기가 많은 선생님의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훌륭하신 분들. 수백 명 이상의 합격자가 품질을 보증한다고 한다. 학교든, 학원이든 선순환 구조를 적극 이용한다. 될 사람만 붙여서 되게 만든다. 안 될 사람을 거르지 못하는 학원은 모수를 크게 한다. 절대 수치를 보는 것이지 비율을 보는 것은 아니니까. 마케팅일 수도 있지만 결국 많이 보이는 곳을 찾게 된다.


그렇게 찾은 곳, 또 한 번의 용기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 선생님은 개별 상담에서 내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보셨다. 결국 정성대는 어차피 안되고 정량대는 점수니까. 두 분의 말씀 중 공통점이 있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속전속결로 끝낼 것. 풀타임 1년. 죽을 듯이. 그리고 재밌게도 전공 선생님들이 토익을 강조하신다. 지난번 입학 실장님과 같은 이야기이다. 많은 수험생들이 토익 점수 때문에 실패한다고 한다. 의아했다. 전공이 아니라 토익이라...


토익은 무조건 만점인 990점을 받아야 했다. 속된 말로 비벼보려면 985점은 되어야 했다. 물론 예외도 있을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980점부터는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만점이 쉬운 점수는 아니지만 다른 부분에서 그렇게 노력해 놓고 토익 때문에?라는 의문점은 가시질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토익 잘 안 나옵니다. 자꾸 딴생각이 나요. 쉽지 않을 겁니다."


"전공 공부부터 하면서 토익도 같이 할까요?"


"아니요, 토익 점수받고, 적어도 970 이상 받고 전공 들어가세요. 그리고 만점 나올 때까지 계속 치세요."


단호했다.

전공을 책임지는 분이 한 말이라 의아했지만 믿음이 갔다.


카페, 블로그, 개인과외 선생님들과의 상담으로 정보를 취합했다. 적어도 내가 얻은 정보로는 동일한 결론이 났다. 토익 점수 없이 전공 들어가지 말라는 전공 선생님의 조언, 15년 정도 영어를 하지 않아 영어 기어에 녹이 슬어 버린 나. 토익부터 잡는다.


토익으로 현재의 공부 두뇌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점수가 안 나온다면 영어든 전공이든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질 수 있고 그렇다면 경쟁자들보다 기대 수명이 많지 않은 나는 바로 포기. 게다가 영어를 다시 닦아 놓으면 필요가 생긴다. 영어는 언제라도 쓸 수 있고 언제든지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요물이기에. 갑자기 편입 준비에서 영어 공부로 목표가 바뀌었다. 아내가 또 조언했다.


"애들 영어 이제 당신이 봐주면 되겠네."


이것 또한 아내의 큰 그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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