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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Jan 03. 2020

"향기를 만드는 중이야"


 "아가들은 다 잠들었어?"


 세찬 바람을 뚫고 산책을 마친 나는 조심스레 현관문을 닫았다. 식당에 앉아 우리를 향해 한 차례 끄덕인 그녀는 이내 열중하던 작업으로 돌아갔다. 평소 같으면 이미 잠들었어야 할 시간이지만 그녀 앞에는 온갖 수공예 재료들이 널려 있었다. 레이스, 리본, 작은 플라스틱 꽃장식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목한 흰 그릇에 수북이 담긴 커피 열매알들이었다.


"이 시간까지 뭐해? 슬슬 자야 하지 않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면서도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금방 끝날 거야. 이제 두 개만 더 만들면 돼."


"뭘 만드는 거야?"


욕실에서 목을 축이고 나온 강아지는 입가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와 엄마의 무릎에 주둥이를 부볐다. 그녀는 작업하던 한 손을 내려 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커피 열매 향기가 흥미를 자극했는지 녀석은 손과 식탁 위를 킁킁댔다. 아냐 강한 향기에 질렸는지 털북숭이는 크게 하품을 한 차례 하더니 의자 아래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향기를 만드는 중이었어."




 행복은 늘 도달하기 어려운 경계 너머에 놓여 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따금씩이지만 사소한 오감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른한 오후 무렵 떠 다니는 따스한 커피 향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른한 재즈 선율. 지친 등에 맞닿은 강아지의 따스한 체온. 지친 하루 끝에 맛보는 무언가 달콤한 한 조각. 이렇게 드리우는 여운 전부를 단순한 만족감이나 순간적인 쾌락이라 폄하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전에 선물했더니 다들 정말 좋아하더라구."


 삐딱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투와 편안함이 좋았다.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의도 너머까지 상상해야 하는 상황, 타인들의 언중유골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자리에 몹시 지쳐 있었다. 생각하는 바와 원하는 바를 감추지 못하는 어린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그늘 한 점 없는 그녀와 대화하는 시간이 소중했다. 문밖 세상으로만 나가면 과잉 가동되고 마는 머릿속 탐정들도 이때만큼은 잠시 쉴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 기분까지 신경 쓰면서 살고 싶지 않다면서?"


"조금 달라. 그냥 사람들이 웃는 게 좋아."

주머니에 달린 조화를 매만지며 그녀가 덧붙였다.

"다 같이 웃는 그림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커피알들이 놓인 천을 주머니처럼 감싸 올렸다. 이어 능숙한 손놀림으로 주머니의 주둥이 부근에 하얀 끈을 감고는 정성 들여 리본 모양의 매듭을 다듬었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해 유통기한이 임박한 커피 원두알들을 모아 향낭으로 만들었다. 


 향 주머니는 운동회에서 박 터뜨리기 경기를 할 때 던지는 콩 주머니와 비슷한 크기여서 아이들도 좋아했다. 엄마가 향낭을 테이블에 올려 둘 때면, "엄마, 이게 무슨 냄새야?"라고 물으며 싫지 않은 듯 이리저리 만지며 놀았다. 커피는 쓰지만 커피향은 어린아이들에게도 향기롭게 다가간다. 이러한 친숙함이 당장은 쓰디쓴 음료일 뿐인 커피가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한 걸음씩 서로 가까워지는 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어릴 적 아침마다 맡았던 부모님의 헤이즐넛 향 커피 향기를 더듬으면서 커피를 시작했으므로. 


 "자, 이제 마지막 한 개 남았다."

아내가 의료용 거즈와 비슷해 보이는 직물을 집어 들며 말했다. 원두향이 흘러나오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열매알들을 감싸 안기 위한 재료인 듯했다.


"몇 개나 만드는 거야?"


"오늘은 세 개만 만들 거야. 남은 원두가 많지 않기도 했고, 이번에는 세 군데만 선물할 생각이라서."


"그래. 오늘 날씨도 별로라 피곤할 텐데 얼른 마무리하고 좀 쉬어."


추위에 맞서기 위해 껴입은 외투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그녀를 뒤로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정리되지 않은 내 방에는 산책 때 입은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방 정리 좀 해야 하는데... 휴.."

중얼거리며 입고 나갔다 온 옷을 또 어느 무더기 위에 휙하니 던졌다. 사람이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일들이 가끔씩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잠옷을 걸치는 순간, 커피 향기가 코를 확 찔렀다. 


방에서 나오며 그녀에게 말했다.

"내일은 방을 좀 정리해야겠어. 너무 너저분해서 향기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잖아."


"그러게."

그녀는 미소로 답했다.




세찬 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밤.

옷가지가 너저분하게 널린 어느 방 책상 위에,

작고 흰 향낭 하나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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