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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Oct 29. 2018

"뚜구뚜비뚜루"


 거실 한쪽 귀퉁이에는 천이 헤진 회색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답을 아는 이들은 모두 먼 길을 떠났다. 의자에 남겨진 수많은 상흔에 살을 맞댄 채 자주 시간을 보냈다. 투박하지만 누구도 성가시게 여기지 않을 듯한 안정감이 좋았다.      


 날이 흐린 탓에 몸이 무거웠다. 태풍이 밀려온다는 일기예보에 아침 운동은 일찌감치 포기한 상태. 작고 가벼운 소설책을 쥐고 거실로 나섰지만 분침이 반 바퀴를 돌았음에도 두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했다. 애정을 갈구하며 발치에 누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이른 오전을 흘려보냈다.






 강아지가 현관으로 뛰쳐나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자고 있었어?"

그녀는 신이 난 강아지를 한 팔로 안아 올리며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른 새벽부터 운동하러 다녀온 모양이었다.  


"잠깐 졸았나 봐."

 예사롭지 않은 눈꺼풀의 무게에 눈을 감은 채 답했다.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해도 아침 시간에 잠들어 버린 스스로의 모습은 개운치 않았다.


"어제 꽤 늦게 자러 들어왔지?"


"응. 생각보다 잘 안 돼서."


"일찌감치 쉬지 그랬어. 같이 운동했으면 좋았을 걸."


"비가 내린대서 지레 포기하고 있었어. 늦게까지 깨어있다 보면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는데, 번번이 이래서 미안해."


 어제도 어둑한 방에 들어앉아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은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무언가가 손에 남을 것만 같았지만 결국 한 장(章), 한 페이지, 한 단락, 심지어 한 문장도 낳지 못했다. 오히려 의미조차 파악하기도 어려운 한 어절만 남기고 침실로 향했는데, 굳이 어절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정말로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담요를 걷어내고 거실로 나서며 식탁 위에 열어 둔 노트북을 애써 모른 척했다. 눈만 꿈벅이는 노트북 앞에 엎드려 별다른 성과 없이 잠든 밤은 더 이상 셀 수조차 없었다. 간밤의 작업은 굳이 다시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무려 3시간 반을 들여 적어 낸 말은 여섯 음절의 조잡한 말장난이었다.


"뚜구뚜비뚜루. 그렇게 적혀 있었어."

"무슨 의미야?"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이리저리 돌리지 않는 어투가 좋았다. 때로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담백했지만 뒤편의 진심은 늘 따뜻했다.


"캡슐 하나 내리려는데 혹시 커피 생각 있어?"

짐짓 못 들은 척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아. 난 오는 길에 한 병 사 왔으니까."

그녀는 크고 검은 뚜껑이 달린 플라스틱 병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분명 저지방 우유가 들어간 달달한 커피겠지. 나는 우유나 설탕이 가미된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는 진한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우리에게 공통적인 취미가 있다면 그건 스스로는 결코 마시지 않을 종류의 커피를 사다가 상대에게 대접하는 일이었다.






 투명한 병에 담긴 캡슐들 중 두 번째로 진한 커피를 골랐다. 기분이 그랬다. 좌절스러운 마음을 안고 침실로 향하기 직전, 자조 섞인 한 마디를 바탕화면 한 귀퉁이에 적어두었다. 화면보호기나 절전 모드를 설정하지 않는 습관 탓에 이른 아침 운동을 나가던 그녀의 눈길에 닿은 모양이다.


"모든 일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머금은 커피가 유난히 쓰게 느껴졌다.


 "신기하네. 나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집에 왔는데."


"뭘, 누구나 항상 품고 사는 생각일 텐데.

 다만 어 유난히 그런 마음이 간절했어."


"나는 간절하다기보다 그냥 여러 모로 잘 풀리면 좋겠다, 하는 작은 소망에 가까웠어."


"다행이다."


"뭐가?"


"당신마저 간절했다면 조금 슬플 것 같아."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충분히 알고 있다 믿었다. 틀렸었다. 아나콘다나 코모도 도마뱀을 마주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여행사의 조언만 듣고 무작정 정글 여행을 떠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밀림 한가운데, 수직으로 뻗은 동공을 희번덕이며 다가오는 굶주린 거대 파충류는 미리 김밥처럼 챙겨 간 각오나 초심 따위를 휘둘러 쫓을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공항과 비행기에서의 우리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착륙 후 몸을 맡긴 지프 트럭에서는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약간의 짐과 함께 밀림 입구에 던져졌고, 차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왔던 길로 돌아가버렸다. 그

후미등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순간부터 두려움과 우려만이 남았다. 앞에 놓인 정글은 그림책과 달리 그야말로 리얼했다. 카탈로그에서 본 사진보다 훨씬 빽빽하고 어두웠으며, 상상보다 크고 높았다.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적이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다행히 나아갈 용기보다 돌아갈 용기가 부족했다. 함께 흰 코뿔소를 찾아 떠나자며 손을 꽉 잡아끌고 온 일행이 있었다. 분명 멋진 모험과 여정이 펼쳐질 것이라고 이미 장담했으므로.


 위압적인 경관에 압도된 나의 손을 살며시 잡아끌며 일행이 말했다.

"자, 가보자."


 길은 두 갈래였다. 횃불을 쥐어들고 깊은 숲으로 뛰어들어 안전한 곳을 발견하거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발 딛고 있는 곳에 진흙과 돌을 쌓아 올려 안전한 거점을 만든 뒤에 정글 탐사를 시작하거나. 혼자만의 여정이었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전자를 택했을 것이나 함께 해야만 이룰 수 있는 꿈이고 여정이었다. 일행에겐 코뿔소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후각이, 그리고 내겐 코뿔소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었다.


 밀림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가장 먼저 주변의 진흙과 돌을 끌어모아 둥글게 둔덕을 쌓았다. 이어 마른 가지를 모아다 중앙에 불을 지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츰 진흙 언덕을 높이고, 내부의 공간을 넓혀 갈 계획을 세웠다. 이른 아침 둔덕을 나설 때에도 점심 전에는 돌아오기로. 만일 조금 더 늦어진다 해도 해지기 전에는 복귀하기로 약속했다. 밀림에 막 도착한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탐사나 사냥의 성과가 아닌 생존이었다.




 녹초가 되어 해 지기 직전 둔덕으로 돌아온 어느 저녁이었다.


"이렇게 매일 돌아오려니 탐사를 나갈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어. 지난 곳을 또 지나고, 들춘 바위를 또다시 들추는 날의 반복이야."

찾아내겠다 다짐한 보물은커녕 제대로 된 사냥감조차 구하지 못한 채 돌아와 일행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쉽지 않은 곳이야 정말."

짧지 않은 밀림 생활에 일행도 적잖이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늘 움직이는 법이라고 생각해."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고서 내뱉은 탄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일행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이어나갔다.

"발 벗고 찾아 나서서 순식간에 행운을 거머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 한 자리에서 터를 닦고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행운이 제 발로 찾아들길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일행의 표정과 눈빛을, 언젠가 본 기억이 있었다.


"그게 언제일 줄 알고?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어. 어쩌면 빠른 후퇴가 삶을 낭비하지 않는 길일지도 몰라."

뱉어낸 탄식이 있으니 한 차례쯤은 항변을 해보고 싶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가장 우선하는 거라면 그 말이 맞아. 그렇지만 우리는 모험을 떠나 온 거잖아? 합리성이야말로 모험가로서 가장 먼저 벗어던져야 하는 옷이 아닐까."


"어쩐지 뒤바뀐 것 같아."


"뭐가?"


"정글에 오기 전의 내가 하던 말들을 당신이 하고 있잖아."


"그러네."


함께 웃었다.




 꿈꾸는 삶이 있다. 실제로 겪는 삶과는 사뭇 다른, 모든 것이 아름답고 여유롭기만 한 삶의 모습이다. 그러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겨 그곳에 닿고, 누군가는 이를 악물고 혹한을 견디어 그에 닿을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런 자각도 없이 행운을 만나 그곳에 닿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은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나 곧 새로운 꿈을 품고 또다시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한 발짝씩만 나아가리라 다짐했지만 온 삶을 내건 한 걸음이 이토록 무거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필요했다. 스스로에게 나아갈 힘을 부여하는 마법이 필요했다. 멈추지 않도록 억지로 일으킬 주문이 필요했다. 뚜구뚜비뚜루. 멋대로의 정의이나, '스스로를 둘러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충족되어 있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지경'을 의미했다.




"그거, 영어야."


"영어?"


"응. 발음대로 받아 적은 거거든."

일종의 기도였다. 행운을 비는 주문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소망이었다.

"계속 중얼거리다 보니 어느 순간 '뚜구뚜비뚜루'가 되어버렸어."


되도록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능한 나의 갈비뼈 안에서 갈무리를 짓고 싶었다. 숨겼다는 표현이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녀가 몰랐으면 했다. "Too good to be true."


나의 마법 주문을 들은 녀는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몇 차례 입술을 움직여 중얼거렸다.


"자기 암시같은 거야?"


"그래. 나만의 자기 암시였지."


"그럼 이제부터 우리 둘만 아는 주문이야."


".... 그래."


 어쩌면 필요했던 것은 마법이나 주문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필요했던 것은 함께 꿈꾸는 이가 아니었을까.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삶에서 가장 지치는 일은 다름 아닌 홀로 걷고 있다는 외로움이니까.


 졸린 눈, 적당히 식은 커피를 들이키는 앞으로 성큼성큼 지나간 그녀가 낡은 회색 의자에 털썩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가보자. 뚜구뚜비뚜루!"


 알아듣기나 한 양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거린다.

어쩐지, 기운을 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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