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은 좀 내렸어?"
"아주 약간. 이제야 조금 안정세로 접어드는 것 같아."
"주말 내내 고생이 많았네, 우리 모두."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그래도 크리스마스 휴일까지 전부 반납한 건 좀 아쉽다."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크리스마스랑 연말 분위기 풍기는 곳에서 놀게 해주고 싶었는데 꼭 12월만 되면 아프단 말이지."
"한 해 내내 잘 버티고 막판에 내년을 대비해 액땜하는 셈 쳐야지."
그녀가 얼룩말 무늬 머그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머금는 동안 그는 짙은 암막 커튼을 활짝 걷어냈다. 지난 나흘간 아이가 독감으로 고생한 탓에 둘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엄마로서의 그녀, 아빠로서의 그에게 주어진 책임감이란 버거운 무게인 동시에 한없는 행복의 증거이기도 했다. 때때로 너무 무겁지 않냐고 그녀가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이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거운 데도 힘겹게 짊어지는 이유는 결국 한 가지가 아닐까? 그만큼 소중하니까. 어떤 의미에서도 소중한 대상이 없는 삶보다는 버거워도 소중한 게 있는 삶이 낫다고 생각해."
"와, 창밖 좀 봐. 눈이 많이 쌓였어."
"정말? 어제저녁 무렵부터 조금 흩날리는 것 같았는데 밤새 계속 조용히 내렸나 보다."
찻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온 그녀의 눈에 비친 풍경은 온통 새하얬다. 거리의 행인들은 모두 우산을 쥐어 든 채 뒤뚱거리며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차들은 온통 새까만 눈으로 뒤덮인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느릿하게 바퀴를 굴렸다. 썰매를 들고 뛰쳐나온 아이들은 자그마한 언덕에 모여 꺄꺄 소리를 지르며 눈밭을 굴렀고 몇몇은 눈사람을 굴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쉽다 정말. 눈 내리는 것도 보여주고 꽁꽁 단디 입혀 데리고 나가서 눈사람도 같이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 좋아할 텐데.."
"너무 속상해하지 마. 눈은 또 내릴 거야. 아픈 거 낫는 게 우선이지."
"그래도 오늘처럼 예쁘게 많이 내려서 쌓이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니까."
"나중에 눈이 오늘처럼 예쁘게 쌓이면 당신은 무조건 눈밭에서 놀게 해 줄 거야? 학교나 학원에 가야 해도?"
"아무리 그래도 학교나 학원을 빼먹고 눈 놀이하게 놔둘 수는 없잖아."
"그렇겠지. 다만 언제부터 눈밭에서 맘껏 뛰노는 것보다 학교 수업이나 성적이라는 게 이 세상에서 더 중요해진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
이렇게 말하며 그는 창가 옆에 놓인 높은 원형 의자에 걸터앉았다. 흑빛이 감도는 목조 다리 넷 위에 코르크 재질 상판이 놓인, 걸터앉기에는 제법 높이가 있는 의자였다. 그는 이 의자를 [말콤]이라고 불렀다. 무언가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 그리고 기분이 좋을 때마다 그가 말콤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말이야, 예를 들자면 기준을 정하는 거야. 적설량이 5cm를 넘기는 순간 그날 해당 지역은 자동적으로 전부 휴교, 휴무에 들어가는 거지. 제도적으로 하루 동안 모든 업무와 공부를 멈추고 눈을 구경하고 즐기는 거야. 그리고 후에 수업과 업무가 재개되면 지난 눈 온 날을 충분히 만끽했다는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 거지."
"발상은 재밌네. 눈 오는 날을 즐겼다는 증거가 뭔데?"
"각자 다르겠지. 직접 만든 눈사람이라든가, 친구나 가족들과 눈싸움을 하는 사진이라든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끼적인 짧은 글귀라든가 각자 재량껏 준비하는 거지. 무엇이건 간에 내리는 눈, 눈이 오는 풍경, 눈 내리는 날 자체를 있는 그대로 즐겼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만 있으면 돼."
"그런 과제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경우엔? 벌금이나 무언가 손해 보는 게 있는 거야?"
"그럴 리가. 다음에 눈 내리는 날 두 배로 더 즐겼다는 증거를 제출하면 되지."
"뭐야, 너무 주먹구구식이잖아."
그녀가 엷은 미소를 띤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소 핀잔을 주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눈 오는 날을 즐길 권리]라는 걸 법제화하는 거야. 이름은.. 한자의 눈 설(雪) 자와 '즐기다'의 첫자를 따서 [설즐권] 정도가 어떨까. 한자로만 짓는 것도 딱딱하고 순한글로만 짓기엔 좀 가볍잖아?"
둘은 함께 웃으며 창밖의 설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약간, 슬프긴 해."
찻잔을 창틀에 내려놓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가가 눈 오는 날을 못 즐기는 게?"
"아니. 눈 내리는 날에 대한 시선이 말이야. 저렇게 예쁘게 새하얗게 내려와 쌓이는데, 통행에 불편하다고 치우고 녹이고 약품도 뿌리고. 당신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그냥 조금 슬프다 싶었어. 하얀 세상을 하루 이틀 즐길 마음의 여유가 이 시대의 우리에겐 거의 남아있지 않구나 싶어서."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말콤에서 내려와 탁자 위의 전자 체온계를 집어 들었다.
"잠깐 열 좀 재고 올게."
"깨우지 않게 조심해."
그는 싱긋 웃더니 아가가 잠든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면서 아직 따스한 찻잔을 양손으로 쥐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즐길 권리라니…"
"그래."
어느새 방에서 빠져나온 그가 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의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37도 1부. 내일은 털부츠, 장갑, 마스크, 털모자에 내복까지 전부 껴입고 다 같이 나가자."
"아직 열이 다 내린 것도 아니잖아."
"내릴 거야."
그녀의 찻잔을 건네 받은 그가 한 모금 삼키며 단언했다.
"저렇게 하얗고 예쁜 눈을 즐길 시간은 오늘 아니면 내일뿐이야. 모레는 전부 시커멓게 더러워져 있을 테니까.
필사적으로 누려야 하지 않겠어? 눈을 즐길 권리 말이야."
오늘은 아직,
세상이 새하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