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인생에는 중요한 가치가 많다. 사랑, 일, 가족, 행복, 꿈, 취미, 여행 등 어느 하나 서로에 버금가지 않는 삶의 소중한 요소들이다. 허나, 평소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가치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가치, 바로 '건강'이다. 사랑도 일도 가족도 행복도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허황된 꿈으로만 남는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겉보기에 돌도 씹어 삼킬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강인한 견종처럼 보인다. 분명 불도그처럼 주름 사이사이 마다 신경을 써야하거나, 그렇다고 잔병치레가 많은 견종도 아니지만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던 썰매개 치고는 섬세한 손길과 보호를 필요로 한다.
제노의 건강에 대해 언급하자면 일단 한숨부터 나온다. 강건해보이는 외모와는 별개로 '가지가지 다 한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심려를 끼쳤다. 물론 지금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우리 역시 많은 공부를 통해 녀석의 건강을 지켜주려 애쓰다보니 큰 문제는 없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가슴 철렁한 순간, 아픈 모습에 속상한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순간들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이 싹트고 자라난다는데, 그 말대로 우리는 제노의 건강을 돌보는 과정에서 전에 없던 부성애와 모성애까지 생겨나버렸다. 이젠 돌이킬 수 없어진 것이다.
반려견의 1차~5차 백신 접종은 요즘 세상에선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접종을 마치고도 심장사상충 예방이라든가 항체검사를 통한 추가 접종 등 반려견의 기본적인 면역 체계 확립은 과거 그 어느 시절보다도 발달해 있다. 어릴 적 파보 바이러스로 꼬마 도베르만을 잃은 내게 있어 제노의 접종 과정은 일종의 광신이자 성역이었다. 일반적으로 3, 4차 접종까지 마치면 산책 훈련을 시키기도 하고 밖에 데리고 나가 놀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든 과정이 끝나기 전까지 험난한 세상에 접촉시키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2~3개월의 접종 기간 동안 제노는 굳이 야외 활동이 아니어도 금방 놀다 지쳐 잠들곤 했다.
4차 접종을 마친 뒤 대망의 마지막 5차 접종날이었다. 이 광견병 주사만 맞고 나면 사나흘 뒤부터는 본격적인 야외 외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껏 들떠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수의사가 이전까지의 주사와는 달리 광견병 주사는 대략 300 마리 중 한 마리 꼴로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알려주면서 구글에서 그러한 사례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눈꺼풀과 코, 얼굴이 완전히 팅팅 부은 모습이었다.
부은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지만 어차피 300 분의 1 정도의 확률, 퍼센티지로 따지면 약 0.33%의 확률이었다. 수의사분도 만일의 경우에 대해 미리 고지를 드리는 것뿐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우릴 안심시켰다. 우리는 즐겁고 밝은 분위기에서 접종을 잘 마쳤고, 씩씩하고 무던한 제노는 아픈 주사를 놓건 말건 아빠 품에 안겨 있으면 그걸로 좋은 녀석이었다. 그날은 접종 마무리 선물로 맛난 개껌까지 받아들고 제노는 한껏 신이 나 있었다.
그날따라 제노는 동물 병원에 가기 전부터 얌전하고 차분했다. 아침부터 식탁 의자 발치에 와서 곤히 잠든 모습이 아직 털갈이를 겪지 않은 밝은 은빛 모색과 참 잘 어울렸다. 특히나 더 예뻐해 주고 어루만져주면서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호들갑을 떨며 우리는 제노를 데리고 동물 병원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마지막 접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신나게 개껌을 뜯던 제노, 우리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점심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갑자기 제노가 개껌을 저쪽에 버려두고 우리 발치에 와서 드러눕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사료 외에 간식을 잘 주지 않지만 특별한 날이기에 허락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제노는 간식이라면 정신 못 차리고 하루 종일 갖고 놀아야 정상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제노는 그 300 마리 중에 한 마리 나올까 말까 한 바로 그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눈꺼풀이 살짝 붉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별로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었기에 우리가 과민 반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3분쯤 뒤부터 사건이 벌어졌다. 눈두덩이 엄청난 속도로 부어오르기 시작하고 얼굴 전체가 물풍선에 물이 차오르듯 팽팽해졌다. 심지어 발바닥도 극심한 열을 내며 탱탱하게 부풀었다. 설마, 설마!
접종을 받았던 병원까지 갈 여유가 없어 더 가까운 동물 병원에 다급하게 연락을 했더니 '최대한 신속하게 데려오셔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혼비백산이었다. 전화 통화를 하는 2분 사이에 제노는 오른쪽 눈에 이어 왼쪽 눈까지 뜰 수 없는 상태로 부어올랐다. 점심 식사를 한 식탁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우리는 제노를 들쳐 업고 가장 가까운 동물병원으로 황급히 향했다. 접종한 병원에서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해 지나치게 기관지가 부어오르면 질식할 가능성도 있다고 주의했던 기억이 나 우리의 마음은 더욱 급했다.
동물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제노는 항히스타민 주사를 맞으며 처치를 받았다. 그 동물병원에서는 이전에 한 차례 호텔링을 하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잔뜩 부어오른 눈으로도 어딘지를 알아챘는지 선생님 품에 안겨 좋다고 신나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자기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품에 안겨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그 모습에 박장대소했다(아직도 제노는 이 동물병원만 좋아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다).
병원에서 꼬박 하루를 지내며 치료를 받고 돌아온 다음에도 제노의 부기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원래 얼굴로 완전히 돌아오는 데에는 약 닷새가 걸렸다.
'300분의 1의 확률', 0.33% 라는 숫자도 우리 가족이 해당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헐레벌떡 데려간 동물 병원의 수의사 분도, 그곳의 직원들도 책에서 그러한 사례에 대해 공부하거나 본 적이 있을 뿐 실제로 접하기는 처음이라면서 다들 놀라워했다. 나는 벌써부터 내년의 광견병 백신 접종이 걱정된다. 다른 제약회사에서 나오는 약을 사용하면 조금 나을 것이라지만 해당 성분에 제노가 예민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광견병 백신 알레르기 반응 사태'가 지금까지 제노와 함께 한 모든 순간들 중 가장 가슴 철렁하고 마음이 다급했던 제 1순위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시베리안 허스키의 약점은 직사광선에 취약한 눈과 예민한 소화기관이다. 온갖 벌레나 돌, 실뭉치를 먹어도 끄떡없을 것 같은 역사와 외모, 풍채를 가진 녀석들이지만 의외로 소화 기능이 매우 약한 편이어서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애견 간식도 함부로 먹여서는 안 된다.
먼저 사료는 70% 이상의 육류 단백질로 구성된 것을 먹여야 허스키의 체력이나 모질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육류 역시 성장기가 끝나갈수록 그 비중을 생선 단백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좋은데, 이는 시베리안 허스키들이 동반자인 추크치 족과 함께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생존하는 역사 속에서 생선류를 주식으로 삼았던 것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을 견디기 위해서는 고단백질과 양질의 지방산이 필요하며, 그 모든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것은 일반 육류가 아닌 생선류라는 사실을 추크치 족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허스키의 소화기관은 우유 성분으로 만든 껌 등의 유제품류, 화학 조미료가 첨가된 간식들에 매우 취약하다. 먹기는 잘 먹지만 설사와 구토를 유발하고, 묽은 변의 원인이 되는 등 부작용이 상당하다. 이것저것 구해서 먹여본 결과 허스키의 소화기에 무리를 일으키지 않는 간식은 깨끗한 물로 얼린 얼음, 사료 알갱이(보통 주식으로 먹이는 사료와는 다른 맛으로 구비한다), 건조한 생선육 간식이었다. 비싸고 좋은 천연 간식이라고 사다 먹여도 끊이지 않던 묽은 변과 설사, 심하게 냄새가 나는 소변 등의 증상은 간식의 방향을 바로잡으면서 일소되었다.
전에도 강조한 적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키우는 반려견종에 대한 전문 자료, 서적을 통한 공부와 연구다. 동물 병원이나 펫샵에서는 워낙에 다루는 견종이 다양하기 때문에 견주의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견종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론'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극심한 식이 알레르기가 있어 자신의 반려견은 알레르기 사료밖에 못 먹는다면서 병원에서 권한 식이 알레르기 사료만을 먹인다는 분이 있었다. 그 사료는 분명 식이 알레르기 사료이긴 했지만 거의 최하급 판정을 받은 사료였다(지적을 듣고 그분은 곧바로 최상 등급의 식이 알레르기 사료로 바꿨다. 병원에서 알레르기 사료를 먹여야 한다고 해서 따라만 갔지 알고 보니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식이 알레르기 사료만도 종류가 30종이 넘었던 것이다). 조금만 읽어보고 비교해보고 찾아보면 훨씬 더 나은 선택으로 반려견의 건강을 챙겨줄 수 있다. 자신의 반려견에 대한 이해와 공부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부분이 절대 아니다.
시베리안 허스키 전문 서적을 보면 적정 목욕 주기는 '1년에 두 차례', 혹은 '3달에 한 차례'라고 되어 있다. 실내에서 기르면서 매일 산책도 시키고 다른 개들과도 놀게 해준다면 1년에 두 차례 만의 목욕은 현실적으로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제노는 보통 한 달에 한 차례 목욕을 한다. 깊은 애정으로 반려견을 기르는 분들에게는 한 달에 한 차례 목욕이라는 것도 비위생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시베리안 허스키는 몸에서 유분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샴푸 향이 한 달 내내 지속되고 특별한 영양제 등의 관리가 없이도 모질이 보송보송하게 유지된다.
허스키의 이런 특별한 체질 덕분에 거의 두 달간 목욕을 하지 않았어도 일주일 전에 목욕시킨 다른 개들보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참 관리를 잘 하시나 봐요"하고 제노를 쓰다듬고 가는 분들도 얘가 제대로 씻은지는 한 달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치 못한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데 대단히 성실한 견주로 여겨질 때마다 참 머쓱하다.
현재 그 무엇보다 난항을 겪고 있는 항목이다. 운동량을 더 이상 뛰거나 걷지 못할 때까지 충족시켜주는데도 불구하고 제노의 몸매는 '드럼통형'이다. 시베리안 허스키의 이상적인 몸매는 '모래시계형'으로, 네 다리로 서 있을 때 배가 위쪽으로 착 달라붙은, 전문 서적의 영어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neat'하게 빠진 라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제노는 모래시계는커녕 직사각형도 못 되는 드럼통형이다. 우리 눈에는 통통하고 토실토실한 게 너무나 귀엽게 느껴지지만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견종에 있어서 과체중 및 비만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한 체중으로 인한 관절 질환과 엉덩이뼈의 탈구 증상인데, 이는 한 번 발생하면 보통 완치나 회복이 불가능하고 운동량의 감소로 이어져 악순환을 불러일으키므로 철저히 사전에 방지해야만 한다.
제노의 비만과 과체중의 원인은 바로 사료였다. 자견에게 적합한 고단백 고영양분의 사료를 먹이다 보니 급속으로 성장하는 시기에는 적정한 몸매와 체중을 유지하며 자랐지만 성장세가 막바지에 이르고 둔화되다 보니 잉여 체중으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한창 사춘기, 성장기 때 평소보다 두 배, 심지어는 세 배씩 먹으면서 키도 크고 덩치도 커지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같은 식사량을 유지하면 순식간에 옆으로 불어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우리는 10개월을 기점으로 제노의 사료를 성견용으로 교체할 준비를 마친 상태다.
토실토실했던 제노가 미끈한 늑대처럼 변해버리면 어쩐지 아쉬울 것만 같다. 그래도 건강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선 달리 방도가 없다(ㅠㅠ).
아직 아이를 키워보진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다가올 그 삶이 어떤 느낌일지, 제노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이젠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책임감과 공부의 연속이다. 매일매일이 새롭고 감동이었던, 혹은 분노였던 제노의 어린 시절은 이제 조금씩 그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다. 이 녀석에게도 삶의 패턴이라는 것이 생겼고, 때로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 뿐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집안에서 천연덕스럽게 생활하곤 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익숙해지고 편안함을 느껴가는 이 순간들이, 싫지 않다. 비록 제노가 어제와 같은 산책로에서 같은 방향으로 길을 꺾어도, '또냐!'하는 생각이 들어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당장 큰 감흥이나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나중에 돌아보게 되었을 때 '참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시절'이라 추억할 수 있는 순간 속을 함께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건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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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편ⅱ : 시베리안 허스키, 그리고 알래스칸 말라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