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꿈꾸다

소회所懷를 꿈꾸다

by WriteWolf


'소회所懷'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마음에 품고 있는 회포',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해 온 소망/미련/애증'이라 정의하지만 이토록 정의 내리기 까다로운 말은 쉬이 찾아보기 어렵다.


때로는 비밀 공간에 숨겨둔 보물처럼, 홀로 먹으려 아껴둔 달콤함처럼 몸이 떨어져 있음에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꼬리가 살포시 말려 올라가게 하는 그 무언가. 어쩌면 마음에 둔 상대와 만난, 혹은 만나기로 한 장소와 시절에 대한 기억과도 같은, 굳이 예를 들자면.




굳이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더욱 소중한, 그 다소의 심술궂음이 바로 소회의 핵심이다.


시간, 사람, 장소, 사물 그 무엇이어도 좋다. 오늘 누군가는 내일 자신이 차려입을 옷의 무늬에 대단한 만족을 느끼며 내밀한 소회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운동화 하나를 새로 산 적이 있다. 포장을 뜯고 처음 신은 순간 온 발에 착 감겨오는 느낌과 푹신한 감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새로 산 신발이 어떠냐는 물음에는 짐짓 무덤덤하게, "응.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답을 하고 말았다. 속으로는 한시라도 빨리 산책를 향해 내닫고 싶었으면서.


누군가에게 굳이 알려 공감받을 이유도, 그럴 가능성도 없는 나만의 즐거움을 오롯이 간직하고 싶었다.




소회의 세계는 자유롭다. 자아가 구축한 스스로의 세계이자 관점인 까닭이다. 어쩌면 자유롭다는 표현보다 이렇게도 해볼 수 있고 저렇게도 해볼 수 있는, 이른바 타인의 시선이나 인식으로부터의 해방감이 보장된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어떤 만화에는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을 때마다 자아를 되찾아 자신들만의 삶을 살아가는 장난감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갓난아기들도 엄마의 눈길이 닿지 않는 순간에는 어른처럼 일어서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만의 여유와 소회를 만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억지 미소를 짓고, 틀에 박힌 답변을 늘어놓다가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으로 돌아와 푹신한 어딘가에 몸을 던지면 그토록 행복하고 안온할 수가 없다. 다만 이는 소회가 아닌 만족이다.


소회는 고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쾌락과 만끽이 있는 그대로 실현되기 직전의 순간까지만 살아 숨 쉰다. 먹고 싶은 음식을 상상하며 침을 삼키고, 그 음식이 눈앞에 놓인 장면을 바라보며 그 맛을 뇌리에 그려보는 순간까지만.


행복과 만족에 대한 상상. 이로부터 비롯되는 내밀한 만족감을 바탕으로 내면에서 벌어지는 파티라고나 할까.




나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즐겁다. 그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고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감히 나만의 즐거움을 상상할 수 없음에 일종의 승리감마저 느낀다.



어젯밤 남몰래 정리해 둔 옷장에는 나의 옷가지와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의 옷이 나란히 걸려 있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대수냐고 여길 것이나 그들과 무관한 타인으로서의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옷장을 여는 순간, 틀림없이 행복한 기분을 불러일으킬 장면이 펼쳐질 것임을.


타인들에게 인정받고 좋은 말을 듣는 것은 분명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없는 곳, 모르는 곳에서도 그들과 무관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더욱 행복할 수 있다.




때로는 마음속에서만 펼쳐져도 충분히 즐겁다.


맨발로 뛰쳐나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거닌다는 상상.


즉흥적으로 역사에 들어가 표를 끊고 어딘가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싣는 장면.


사랑하는 이와 손을 잡고 거닐며 낙엽을 바스라뜨리는 소리.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을 끝마치고 선술집에 몰려가 들이킬 차가운 맥주 한 잔.


세상이 우리를 주저앉히고 무릎꿇리는 와중에도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 꿈속 따뜻한 곳으로 숨어든다. 그토록 기꺼이 뛰어드는 달콤한 소회의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명은 무겁다. 입장이란 지나치게 상대적이고, 의무는 하나의 억압으로 다가온다. 언젠가부터 살아간다는 것이 사명을 찾아 책임감을 가지고 의무를 다하는 형태의 작업이 되어버렸다. 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꽉 조이는 안전벨트에 대해 약간의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고심 끝에 택한 길이 소회였다.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떠나기에 그 '모든 것'은 말 그대로 나의 소중한 '모든 것'이었다. 다만 마음속에 작은 방 하나를 만들어 [소회]라는 푯말을 앞에 세워두기로 했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 감춰둔 초콜릿 하나, 너무나 편해서 아무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운동화, 액셀레이터를 밟으면 자동차가 비단처럼 치고 나가게 만들어주는 엔진오일.


사소하지만 그렇게, 나의 세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혼자만의 사색에 빠지고, 혼자만의 공간에 녹아든다. 누군가가 시키지 않아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잠시 거리를 두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다 보면 그러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분명 찾아온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따뜻한 가슴 속 공간, 그리고 뒷주머니에 숨겨둔 달콤한 生의 사탕. 이를 두고 소회라고 말하게 되었다.




삽화 : Cover . Helen Cottle / ⅰ. Milena Tsochkova 作 / ⅱ. Steve Hanks 作 / ⅲ. Alex Alemany 作 / ⅳ. Gilles Grimoin 作 / ⅴ. Eric Zener 作 / ⅵ. Tomas Sanch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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