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꿈꾸다

바람을 꿈꾸다

by WriteWolf


어쩐불어올 것만 같다. 때가 무르익은 까닭도 있으나 그보다는 아무런 전조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창을 열어두었다. 손가락에 침을 묻힌 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가늠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여러 차례 따라 시도해보았지만 늘 손가락만 침 냄새로 퀴퀴해질 뿐이었다. 어디서 바람이 시작되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언제나 그랬듯, 어딘가에서 비롯되어 이곳에 당도한 또다시 어딘가를 향할 것이므로.


이곳을 지나쳐 갈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번에도 역시 모든 것을 남김없이 휘감을 것이며 우리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오를 즈음 스륵 매듭을 풀고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훨훨 날아가버릴 것이다. 결국 또다시 남겨지는 것은 뒷모습과 여운 뿐으로, 도저히 동경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선가 휙 하니 불어와 이곳에 덩그러니 남겨져 다. 아니, 정황상 그랬을 것이라 추정한다.


시작된 곳을 알아내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밤을 새워 고민하기도 하고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떠나보기도 했다. 길 위에서 답을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의문인 채로 남아있으며, 이젠 그에 안도감 마저낄 정도로 익숙해졌다.


오랜 시간을 들여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 내려놓자 어느 새 알 수 없었던 모든 것이 삶의 신비로움으로 거듭났다. 기분 좋게 불어와 볼을 두드리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째서 얼굴을 간질이는 살랑임에아지는 것일까,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들잠시 제쳐두고.


그럼에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뇌리를 맴도는 물음이 하나 남아 있다.


'의문을 품은 것은 과연 나 혼자뿐일까?'





마지막 남은 의문에 대한 답이 '아니오'라는 것을 깨달은간, 가장 기뻤다. 그와 같은 인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깊은 소통에 벅찼다. 누군가 따로나마 함께하고 있음에. 때로는 꼭 말이 통하는 인간 존재가 아니어도 좋았다. 곁을 지키는 강아지, 항상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인형도 어디선가 불어와 맴도는 바람처럼 나를 휘감았다. 답을 몰라도 항상 어딘가에 마련된 자리가 있었다. 불어온 곳을 함께 이야기하고 불어갈 곳을 함께 꿈꿀 수 있는.



마주 앉아 고민하다가 하릴없음에 웃고, 때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나누는 눈빛에 편안함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답을 너도 몰라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너무 거대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알 수 없는 문제를 같은 방향에서 바라보고 마주한다는 동질감이 좋았다. 밤하늘에 뜬 달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라서.




한 줄기 바람이다. 모두가 그러하다. 휙 하니 어디선가 불어와 영원히 이곳에 머무를 것처럼 치열하게 맴돌다 또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겠으나 바람에 빗댄 일생의 여정만큼은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불어가고, 낮은 곳을 굽이쳐 다시금 높은 곳을 향해 내뻗는다. 새하얀 신부의 양 볼을 간질이는 봄바람도, 창문 마구 두들기는 거센 밤바람도, 모든 것을 재구성하려는 듯 휘몰아치는 돌개바람도, 실은 어디선가 불어와 어디론가 불어가는 한 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산들바람처럼, 다른 누군가는 계곡을 타고 넘나드는 바람처럼, 누군가는 뜨거운 돌풍처럼 살아간다. 과연 나는 어떤 바람이 되고 싶은 것일까. 가장 좋아하는 시의 첫 구절은 이러했다.


"As a wind of the sea, I blew."

"한 줄기 바닷바람으로, 나는 불었다."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을 휘감아 흐르는 한 줄기 바람처럼, 그렇게 불어왔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 모두와 함께 불어갈 것이다.


어쩐지, 곧 불어 올 것만 같다.





삽화 : Cover . Andrew Wyeth 作 / ⅰ. Casey Baugh 作 / ⅱ. Jacek Yerka 作 / ⅲ. Andrew Wyeth 作 / ⅳ. Gianluca Caramatti 作 / ⅴ. Marc Chagall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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