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꿈꾸다

도무지를 꿈꾸다

by WriteWolf


한밤의 바다, 작은 돛단배 위에 누워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조차 잊었다. 사방을 둘러싼 하나의 수평선은 형언조차 어려운 어둠 저편으로 숨었다. 느껴지는 것은 잔잔한 물결과 바람의 일렁임뿐.


넘실대며 밀려오는 두려움에 더 이상 바다를 바라볼 다. 빈틈없는 암흑이 이토록 소름 끼치는 광경일 줄이야. 두려움에 갑판으로 몸을 돌렸다. 끼익거리는 바닥에 드러누워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렇게 우연처럼, 무수한 별빛이 수 놓인 맑은 바닷밤과 마주쳤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법한 풍경. 맥이 풀리며 긴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입가에선 미소가 번지고 스르르 눈이 감긴다.


"나쁘지 않.."






'도무지'라는 단어의 유래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고문을 일컫는 '도모지'라는 단어가 어원으로, 형벌을 받는 자가 느끼는 고통과 막막함이 비할 데 없어 절박한 심리 상태나 상황에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도무지는 형틀의 공포로서의 도무지와 '막막함'이라는 심상만을 공유할 뿐, 근본적으로는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다. 바로 길이 없는 곳을 일컫는, '도무지(道無地)'.




아무런 일도, 계획도 없는 날이었다.


무작정 밖으로 나서자 문을 여는 순간 얼굴에 달린 여러 감각의 창을 통해 온갖 소음과 방향이 밀려든다. 달리는 버스 소리, 행인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 끊임없이 다른 색으로 바뀌며 번쩍거리는 신호와 불빛까지 무수한 자극의 연속이었다.


길은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포장도 깔끔하고 예쁘게 되어 있다. 표지판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어느 방향으로 흘러 어디에 도달할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듯한 모습으로 치밀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의문이 든다. 어느 길을 택하면 어디에 도착하는지 알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금 이 순간 딛고 있는 곳이 어딘지, 또 내일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는 것일까.


저 멀리 오렌지색 헬륨 풍선 하나가 떠올랐다.





이정표와 이정표 사이, 누군가들의 시선과 시선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어느 새 주위는 어둑해져 있었다.



심지어 흩날리는 신문지도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는 도무지 어디로 발을 떼야할 지 알 수가 없다. 다음 발자국을 남길 곳이 어딘지 알고 있는 듯한 분주한 걸음들이 가장 위대해 보였고, 또 부러웠다.


그러나 거짓을 행할 수는 없었다. 오른쪽과 왼쪽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느 쪽도 좋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상황 자체가 폭력적이고 갑갑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결국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 또한 하나의 선택이라 믿었다. 막힐 듯 눈 앞을 가린 '길'이라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지막 발버둥이기도 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 또한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었다.

다만 듣기 좋은 말은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가슴 아픈 말은 앞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것처럼, 어찌 되었건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결단력 있다는 수군거림은 선택이 옳았음에 아무런 무게도 싣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고 머뭇거린다는 웅성거림 역시 무언가가 틀렸음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길 위에서 마주치고, 엇갈리며, 나란히 걷거나 혹은 무심하게 서로를 스쳐간다. 어떤 이는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는 반면 누군가는 그저 유영한다. 누군가는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며, 또 다른 이는 무언가에 떠밀리듯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모두가 이 거대한 윷놀이판 같은 세상 위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하게, 그리고 공평하게 정해진 것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시작과 종점뿐이다.




오렌지색 풍선을 하나 샀다. 중력에도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날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헬륨을 불어넣기 위해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나선 길거리는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아주 사소하지만 무언가를 자유케 하기 위해 시간과 발걸음을 바친다는 사실은 설레고, 또 소중했다.


알고 있다. 헬륨을 가득 채운 오렌지색 풍선은 자유로이 날아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 즈음 펑 하고 터지거나, 그 어드메에서 바람이 빠져버릴 것임을. 그렇게 힘없고 무가치한 고무 쪼가리가 되어 어느 골목 한 귀퉁이, 혹은 이별의 아픔에 울고 있는 어느 소녀의 지붕 위에 턱 하니 늘어져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다만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훨훨 날아가는 그 모습이, 벗어날 수 없는 도무지 위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우 존재들에게 잠시나마 후련한 상상과 꿈을 꾸게 해줄 수 있다면,


황량했던 도무지에 길을 하나 닦아낸 기분으로 중얼거리며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쁘지 않."





삽화 : Cover . Nick Andrew / ⅰ. Justyna Kopania 作 / ⅱ. Iman Maleki 作 / ⅲ. Zachary Johnson 作 / ⅳ. Jacek Yerka 作 / ⅴ. Helen Cottle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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