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온다.
살기 위하여 올라올 것이다. 올라오지 않는다 해도 분명 이곳에 존재한다. 오래도록 기다렸다. 홀로 노를 젓던 어느 우연한 달밤, 집채 만한 지느러미가 물살을 가르고 내려가는 광경에 나의 운명은 이 해역에 묶였다. 모두에게 주야불철 사방을 나누어 지켜보면서, 수평선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도록 일렀다.
올라온다면 그 모습은 아름다울 것이며, 올라오지 않는다 해도 그 또한 신비로움 속에서 아름다울 것이다.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기에 조바심이 나지만 언젠가 나타날 것이기에 떠날 수도 없다. 그들은 항상 저 아래에 있다. 위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와중에도, 뙤약볕에 모든 것이 바싹 마르는 시절에도, 누군가가 태어나거나 떠나는 순간에도. 할머니 품에서 듣던 이야기에서도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귀를 기울이던 설화에서도 그들은 늘 우리가 발 딛고 선 배 아래 어딘가, 깊지만 금세 치고 올라올 수 있는 곳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바닷속을 유영하는 거대한 신비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에 섞여 살아간다.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희고 거대한 녀석은 이제 전설로만, 그리고 현실성을 배제한 상징으로만 남았다. 녀석들은 그저 숨을 쉬고 살아남기 위해 떠오르고 가라앉았지만, 나는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 꿈을 품었다. 그리고 어느 새 나 역시 녀석들처럼 그저 숨 쉬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만을 치고 있다. 주위에서는 이런 나를 두고 타협하지 않고 꿈을 좇는 사람이라 우러르지만 정작 스스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 사는 것뿐이었으므로.
이곳은 고산지대도, 깊은 해저도 아니다. 그럼에도 공기가 희박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공기는 산소와 질소가 아닌 신비와 낭만, 이어지는 꿈과 희망이다. 잠시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고래를, 이른바 가장 숭고하고 깊은 열망을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과연 언제였는가.
반짝거리는 기계 앞에서 서로의 울타리와 세상만을 엿보고 탐닉하는 일상 속에서, 가슴 속 바다를 헤엄치는 깊고 신비로운 존재를 자꾸만 잊어간다. 벽을 허물고 싶지만 그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다.
지나간 꿈이 있었다. 내려놓은 꿈이 있었다. 지나쳐 버린 꿈이 있었다. 흘러가버린 꿈이 있었다. 잊어버린 꿈이 있었다. 놓쳐버린 꿈이 있었다. 떠올릴 수 없는 꿈이 있었다. 상상으로만 남은 꿈이 있었다. 기억이 되어버린 꿈이 있었다. 외면하는 꿈이 있었다. 애써 부정하는 꿈이 있었다.
이른바 산다는 것은,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씩 꿈을 지워가는 발걸음이었다.
다채로운 꿈을 품은 영혼일수록 삶에 세게 부딪히고 소위 어른이라는 것이 되어감에 따라 더 많은 꿈을 상실했다. 예외는 없었다. 마치 포경선단에 둘러싸인 거대한 고래의 몸뚱아리에 무수한 작살이 꽂혀 있는 모습처럼, 몸부림치며 해저로 숨었다가도 숨을 쉬기 위해 부상하면 또다시 작살 세례를 받고는 점차 스러져 가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너도 나도 [현실]이라는 이름의 포경선단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자기 해역의 고래를 찾아내어 죽이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바다, 미지의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생명체가 유유히 노닐고 있음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어쩌다 보니 배에 오르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해저를 누비는 녀석을 좇게 되었다. 작살은 없다. 포경선단에도 속해 있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든 고래를 만나야 했다.
먼저 찾아온 쪽은 고래였다. 녀석의 솟구친 꼬리지느러미를 본 순간, 모든 것이 돌아왔다. 지나간 꿈. 내려놓은 꿈. 지나쳐 버린 꿈. 흘러가버린 꿈. 잊어버린 꿈. 놓쳐버린 꿈. 떠올릴 수 없던 꿈. 상상으로만 남은 꿈. 기억이 되어버린 꿈. 외면하던 꿈. 애써 부정하던 꿈.
잠시 모든 것을 슬쩍 보여 준 녀석은 물속으로 베시시 종적을 감췄다. 그날 이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그 거대한 고래를 추적해 왔다. 그러던 어느 이른 아침, 이 근처 바다에서 수평선이 잠시 끊어졌다는 관망대의 보고가 있었다. 사력을 다해 이곳까지 항해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녀석이 호흡을 위해 다시 올라올 순간만을, 사방을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다.
녀석을 만나면 꼭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휩쓸려 너무 많은 작살을 던져서 후회한다고. 상처 입혀 미안하다고. 이제부터는 그 어떤 포경선이나 주위의 풍문이 다가와도 모든 것을 걸고 널 지켜주겠다고. 앞으로 펼쳐질 이 항해의 길잡이를 잘 부탁한다고.
고래와의 조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수평선이 끊어졌다!"는 희망 가득한 선원의 목소리가 언제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고래다! 고래가 나타났다!!"
삽화 : Cover . Dumnorix 作 / ⅰ. Vladimir Kush 作 / ⅱ. Dumnorix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