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눈 감으면 펼쳐지는 세상. 혹자는 이를 가리켜 공상의 세계라 부르고, 누군가는 허구의 이미지로 치부한다. 그 입구에는 '상상'이라는 푯말이 멋들어지게 서 있다.
상상의 세계는 자유롭다. 어쩌면 지나치게 자유로운 탓에 호기롭게 시작한 탐험이 금세 끝나기도 한다. 만약 피로감을 동반하고 있다거나 '상상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이는 '상상(想像)'보다는 '구상(構想)'에 가깝다. 상상이 자유로운 공간에서 날개를 펼치는 행위라면 구상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일정한 방식으로 날개를 움직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목적도 의도도 존재하지 않아 자칫 공상이라는 오명을 동반하는 무한한 자유로움. 이것이 바로 상상한다는 행위의 가장 중요한 전제인 셈이다.
얼마 전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곳에서는 다들 자신의 의견과 견해, 시각을 표현하고 피력하는 방식을 배우는 과정을 곧 교육이라 여긴다고.
'이것은 그러하다'와 같은 단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남들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하고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으며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던 모양이다.
친구는 자신이 이곳에서 보낸 학창 시절 동안 배운 것은 '외워야 하는 정답'뿐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를 경험하고, 외국에 나가 실상 깨달은 것은 인생에 오지선다나 정답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니 모두가 굉장히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더라. 어떤 의미에선 그런 목적의식과 열정이 부러웠어. 다만 지나치게 한 곳만을 바라본달까, 어떤 '정답'이라는 걸 미리 정해두고 그에 맞추어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워.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말이야."
피자 조각을 입에 넣으며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들 긍정적인 의미로 발상의 전환이나 역발상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상투적이고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던 기존의 사고방식을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역발상이나 발상의 전환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얼마나 가장 효율적이거나 전통적, 혹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한 가지 길에만 몰입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목적지로 이어지는 길은 결코 하나일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교통편을 택할지 고민할 수 있는 이유는 지난날 누군가가 펼친 상상 덕분이다. 용감 혹은 무모했던 누군가가 처음으로 나무판자를 물 위에 띄우고 올라탄 덕분이며, 어떤 형제가 하늘을 나는 동력기에 일생을 걸었던 덕분이다. 지금은 마치 이성과 수학, 과학, 논리의 결정체로 여겨지는 어떤 공학도 그 태동은 어떤 이가 펼친 상상의 평원에서 시작되었다.
마치 비롯한 곳을 잊은 연어처럼,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만을 떠올리며 '상상한다' 여기는 것은 아닐까.
상상의 세계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가장 손쉽게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사탕을 먹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고, 예쁜 자전거를 선물 받는 상상만으로도 기쁨으로 가득해진다.
누군가는 그와 같은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더욱 큰 좌절과 박탈감을 불러온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일리 있는 말이다. 공상은 실체적인 그 무엇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상의 세계란 그저 무의미한 공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상상은 행복을 가리키는 이정표와 같다. 현실에서 꾸는 꿈이나 떠올리는 행복의 형상은 모두 상상의 세계에서 여러 차례 형상화되고 펼쳐졌던 모습이다. 이는 곧 우리가 현실에서 추구해야 할 방향과 삶의 청사진에 관한 다소 두서없는 스케치인 것이다.
저명한 과학자인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리는 여러분을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무사히 데려다 줄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여러분을 어디로든 데려다 줄 것이다."
사색의 시간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숙고하는 시간이라면, 상상의 시간은 여태껏 없었던 시간과 공간을 자신이 가진 블록들로 채워 넣어 새로운 세상을 그려내는 시간이다.
오늘도 처리해야 할 업무들과 더불어 생각해야 할 주제들이 주변 공기를 매캐하게 메우고 있다. 그럼에도 잠시 시간을 내어 모든 것을 잠시 밀어 두고 상상과 공상의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이러한 노력이 나를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나마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세상에 다녀온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신나는 일이니까.
삽화 : Cover . Vladimir Volegov 作 / ⅰ. Josh Keyes 作 / ⅱ. Blu 作 / ⅲ. Jacek Yerka 作 / ⅳ. Eric Joyner 作 / ⅴ. Michal Matczak 作 / ⅵ. Carol O'Malia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