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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Apr 01. 2016

허수아비를 꿈꾸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허수아비를 그렸다. 황금빛 가을 들판 가운 놓인 허수아비는 물론 새까만 우주정거장에 박힌 허수아비도 있었다. 어른들은 왜 항상 허수아비를 그리냐고 물었지만 당시엔 답할 만한 충분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했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허수아비가 마냥 좋았다.


 상상 속 허수아비는 늘 따스한 햇아래 판에 웃음을 머금은 채 홀로 서 있었다. 때로는 수많은 별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색한 반짝임과 미소를 두기도 했다. 다가갈수록 더욱 환해질 것만 같은 미소였다.




 현실에서는 허수아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차를 타고 시골길을 지날 때 얼핏 보이는 것들제대로 된 허수아비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형상이었다. 양철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있거나 팔이 없을 때도 많았다. 어린 마음에 크게 실망했지만 그래도 마음속 허수아비의 형은 여전히 낭만적이었다.


  어쩌면 현실 속 허수아비들은 대부분 적당한 형상으로만 급조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어린 마음은 동화책에 담긴 정감어린 그림에 지나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어른이 되고보니 허수아비에게 있어 외양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야말로 허수아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자 존재 이유였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허수아비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심이 들기 시작했다. 묵묵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해내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나 해악을 끼치지 않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언제였을까.




 작렬하는 태양. 시끄럽게 주위를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 푸르거나 누런 들판. 이른바 세상이라 불리는 곳의 한가운데가 오묘하게 비어있다.


 그 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이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줄 수 있는 멋쟁이 허수아비같은, 그런 사람으로 기억될 수만 있다면.


오늘도 변함없이, 허수아비를 닮고자 - 허수아비를 꿈꾼다.




삽화 : Cover . Dumnorix 作 / ⅰ. Zachary Johnson  / ⅱ. Dumnorix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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