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by 알랭 드 보통
2011년 3월, 레이크디스트릭트를 여행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미스포터’를 보고 그곳의 사진들을 찾아보면서 '꼭 가야 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여행의 기술>을 읽어내려가면서, '응? 갔던 것 같은데. 맞을 거야.' 하며 지난 다이어리를 뒤적여보고 나서야 '그렇지, 갔었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이어리에는 '호수와 건물도 멋지지만, 내가 사랑하는 영국 구름의 결정판! … 제주 올레길처럼 걷고 걸었다.'라고만 기록되어있다. 계획을 세우며 매우 기대했을 것이고, 여행을 하면서도 매우 행복했을 것이다. 길을 조금 헤맸던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과 이별하고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조금 외로웠던 것 같기도 하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호스텔 같은 곳에 묵었던 것 같은데, 모든 기억이 어렴풋하다.
어떤 장소로부터 돌아오자마자 기억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 즉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는 설렘도 있었지만, 긴 연수가 끝나고 이후에는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여행의 마지막 체류지는 프랑스였다. 여행의 마무리를 며칠 앞둔 6월의 첫날, 다행히도 꼭 참여하고 싶었던 미술기행 투어를 함께 할 수 있었다. 모네와 고흐의 자취를 찾아가는 투어였다. 모네가 그린 지베르니의 수련과 양귀비꽃 가득한 들판, 고흐가 그린 오베르의 밀밭과 그의 마지막 방. 역시나 이 책을 보면서 다시 떠올리기까지는 내가 그들의 그림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그리고 그림에서 보았던 풍경들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기뻤었는지를 잊고 있었다. 그들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곳을 가볼 일도 그 장면들을 천천히 음미하는 일도 없었겠지.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알랭 드 보통은 ‘눈을 열어주는 미술’과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책은 다시 내 기억 속 여행들을 끄집어냈고, 나의 여행들은 이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의 소재가 되었다. <여행의 기술>이 풀어내고 있는 여행 이야기들 중에서도 내가 여행했던 혹은 관심 있는 장소, 또는 아는 작가가 안내자로 들어간 챕터들이 더 잘 읽히고 이해되었다. 내 여행보다는 훨씬 더 깊이가 있어야겠지만, 존 러스킨이 데생과 글그림을 예찬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 사람에게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또 보는 만큼 더 알게 되는 것 같다. 많이, 그러나 천천히 깊이 있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해야겠다. 그것이 어딘가 새로운 곳에서여도 좋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의 일상에서 이뤄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