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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소영 Jul 29. 2023

멈춤 pàusa

제주 반달살기 2일 차의 단상

 이번 안식휴가를 준비했던 시작이자 하이라이트, 제주 반달살기를 시작했다. 사실 준비래 봐야 항공권, 숙소, 세네 개의 체험 예약이 전부였는데, 2일 차에 그중 두 개의 일정이 있었다. 세계자연유산인 거문오름 탐방, 그리고 그림 명상과 요가를 함께 하는 빠우사에서의 컬러요가.


pàusa (이탈리아어) 중지, 휴지, 한숨 돌림


 거문오름의 예약 시간에 맞춰 숙소를 나섰다. 오전에 소나기 예보가 있었지만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거문오름은 세계자연유산인 만큼 탐방 규정이 까다로운데,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고는 올라갈 수 없고(현장에서 샌들을 신고 와서 예약자도 못 올라가는 경우를 두 팀이나 봤다!) 우산/양산/스틱과 음식물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탐방객의 안전과 자연유산의 보존을 모두 위한 것인 듯. 다행히 거문오름을 탐방하는 동안은 보슬비를 잠깐 만났을 뿐 소나기는 내리지 않았다. 땀을 흘리며 올라간 후 시원한 바람이 부는 스팟에서 땀을 식히며 설명을 듣고 숲과 주변 오름을 살펴보는 탐방이었고 오늘은 탐방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 햇빛이 없이 흐리면서 비는 오지 않는 날씨였다. 그래도 우리는 1시간의 가장 짧은 코스만을 돌고 나왔다. 다른 일행들의 선택도 그러했고 엄마와 나의 체력 또한 좋지 않았기에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미리 찾아봐두었던 식당 두 곳 중 내가 먹고 싶은 해물파전과 엄마가 먹고 싶은 도토리묵이 있는 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칼국수가 메인메뉴인 곳이었지만 우리는 제주생막걸리를 곁들여 이 두 메뉴만 시켰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짧은 탐방을 했기에 컬러요가 예약까지는 시간이 넉넉했고, 식사 후 카페에서의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다행히 식당과도 가깝고 요가를 할 빠우사와도 가까운 곳에 푸르름에 둘러 쌓인 가보고 싶은 카페가 있었고, 휴무일이 아닌 날이었기에 카페로 향했다. 카페로 가는 길에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카페 표지에서 카페까지의 외길을 걸어 들어가는 동안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비를 꺼내 입을 정도는 아니라서 엄마와 나는 외투의 모자를 쓰고 걸어가며, '날씨가 참 변화무쌍하다, 인생 같네.'라는 이야기를 잠깐 나눴다. 그런데 웬 걸, 카페는 오늘 휴무였다. 집을 개조하여 만든 카페는 밖에서도 들여다보였는데 불이 켜져 있었기에 작은 희망을 가지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대문 너머에 계시던 사장님이 내부 공사할 것이 있어 이번주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건네셨다. 외길을 다시 돌아 나오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빠우사에 문이 열려 있어 살짝 들어가 보니 앞타임의 클래스가 진행 중인 것 같았다. 선생님의 목소리만 들리는 고요함에 말을 꺼내기가 죄송하여, 비를 뚫고 거리는 좀 있지만 다음으로 가보고 싶었던 카페로 향했다. 1/4쯤 갔을까, 빗줄기가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엄마랑 같이 이대로 더 걸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멈춰 서서 빠른 판단을 했다. 발길을 돌려 다시 빠우사로 갔고, 다행히 선생님께서 일찍 와도 괜찮은 곳이니 소파에서 쉬어도 된다고 해주셨다. 앉아서 젖은 외투를 말리며 창밖을 보는데, 폭우 수준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비가 쏟아지기 전에 비를 피할 공간을 만날 수 있어서. 조용하고 차분한 향과 느낌이 쉬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그렇게 쉬다가 시간이 되어 그림 명상을 하고, 천천히 선생님의 동작에 따라 요가를 했다. 그러는 동안 비는 그쳤고, 수업을 마쳤을 땐 늦은 오후임에도 정오처럼 해가 다시 쨍하고 떠있었다.

 

 상황이나 나를 탓할만한 요소들이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지금에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했다. 날씨는 인생처럼 예측할 수 없는 것, 그저 흐름에 맞춰 가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지난 글에서 다뤘듯 나에게 이번 휴가는 안식이라는 목적에 충실히 보내는 것이면 족하다. 나에게 안식, 쉼이란 정해진 일정이 없이 그 순간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 흐름에 맞춰 보내는 시간이다. 정해진 코스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유유자적하는 산책과 같은. 그렇게 흐르기 위해선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하고 멈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다시 흐를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쉼을 넘어 인생의 법칙인 것 같다. 적당한 휴식, 멈춤과 함께 내 인생에 오는 것들 중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고 그것을 충분히 즐기는 것.

 

 제주도 푸른 밤에도 나는 잠시 멈춤을 하지 못하고, 수업을 듣고 서칭을 하고 일정을 짠다.(그리고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카페에서 의식의 흐름에 따른 글을 쓴다.) 그러고 보면 제주 반달살기도 인생의 축소판 같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요가선생님의 인사말처럼,


빠우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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