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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상택 Jul 27. 2017

118. 덴하그, 착각을 벗다

2017년 4월 28일, 여행 219일 차, 네덜란드 덴하그

인증샷은 이것으로 대체한다

네덜란드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선거였다. 2016년, 파키스탄에 있을 때부터 계속해서 뜨거웠던 한국의 정국이었다. 훈자에서부터 뉴스를 달고 살았고, 아프리카에서도 틈틈히 뉴스를 보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당원 가입도 했고 계속 정치 뉴스를 달고 살았기에 투표는 응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럽 여행 중 어디서 투표를 하게 될지 조금 애매하던 찰나,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임선배'가 네덜란드로 휴가를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고민없이 투표소를 네덜란드로 골랐고, 투표소는 암스테르담이 아닌 헤이그(덴하그)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어쩌면 덴하그는 나에게 착각처럼 다가온 여행지였던 것 같다.


선배와의 산책?

잠깐 여행에서 벗어나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네덜란드 투표소는 네덜란드 대사관이었다. 네덜란드의 수도는 엄연히 암스터담이지만, 행정적인 업무와 왕궁 등은 헤이그-영어로는 The Hague인데 네덜란드어로 Den Haag-에 집중되어 있어 대사관도 그 곳에 있던 것이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덕분이지만 나와 선배는 거기서 만나기로 하고 투표를 마치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선배였다. 회사를 나간 이후로 1년 만에(사실 그 전에 한 두번 뵙긴 했지만) 만나는 선배는 '왜 오랫만에 봤는데 그냥 어제 회사에서 봤던 사람 마냥 멀쩡하다고'했다. 8개월 차 여행자 치곤 행색이 멀끔하다나. 나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더치들과 관광객들이 아니었다면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 사무실을 약간 벗어난 한적한 공원 어딘가에서 선배랑 같이 점심먹으러 가는 풍경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어쨌든, 휴가로 온 선배도, 여행을 하고 있는 나로서도 당일로 봐야 덴하그를 봐야 했다. 하지만 선배도 나도 바쁘게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거니와 '누군가와 다니는 것이 낯설다'라고 하시는 선배를 급하게 몰아부칠 생각도 없었다. "천천히 걸어보지요. 저도 요즘 그렇게 다니고 있어요"로 선배와 점심시간이 아닌 하루 같이 여행이 시작되었다. 돌이켜 보면 여행이라기 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에셔, 편협한 사고를 벗기다

덴하그의 다운타운 근처를 회사 얘기니 연애 얘기니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걷다가 한 박물관에 아이들이 많이 가는 것을 마주했다. 선배가 간단히 조사한-라기보단 오기 전에 검색해보신- 바에 의하면 에셔(Esher)가 이 곳에서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왔다고 했다. 에셔. 일반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름이지만, 내가 일하던 곳에서 에셔의 작품은 엄청나게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다. 착시와 테셀레이션을 이용한 그림이 유명한 그였다. 일하던 곳에서 마주했던 에셔의 스테레오타입을 생각하며 박물관에 들어섰지만 우리의 예상은 멋있게 빗맞았따.

에셔가 대중에게 유명한 이유는 이런 종류의 그림을 많이 남겼기 떄문이다.

박물관을 좋아하냐는 선배의 물음에 '요 근래에 가본 적은 없지만 에셔니까 한 번 가볼까요?' 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나와 선배는 에셔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그는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판화가이자 사진가였다.아마 판화에 사용할 원본을 얻기 위해 사진을 시작하지 않았나 싶지만. 박물관 안에서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에셔의 미적감각과 수학적 내용을 미술에 접목시키는 천재성 그리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내는 독특한 판화세계를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정말 편협했던 에셔가 전부가 아님을 알 수있었다.

에셔 박물관에서 본 것 중 나의 인상에 가장 깊게 남은 작품. Metamorphose


Just Plein, Just happy

Just Plein, 그냥 광장이라고 했던 걸 이름으로 생각했지만_

사실 덴하그는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되있는 곳이기도 하다. 헤이그 특사 파견의 배경이 이곳이고 이준열사 기념관도 마련되어 있었고 나는 그걸 보려고 했었는데, 에셔 그림을 열심히 보다보니 시간이 다 가버렸다. 선배와 나는 어떻게 할까 하다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먹고 각자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햇살이 기가막히는 한 광장이 있었다. "떠나시기 전에 맥주라도 한 잔 할까요" 하며 햇빛이 가득한 그 광장에서 맥주를 한 잔씩 시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곳을 기억하고 싶다고 선배가 말했다. 주변에 있던 더치에게 '여기 이름이 뭐니'라고 묻자. '여기 그냥 광장이야(Here is just plein)'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아마 이름이 딱히 없는 광장이었을텐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재밌었다. 그래, 장소가 무슨 상관이랴. 좋은 날씨, 좋은 음식,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있는 것인데. 그냥 광장에서, 선배와 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선배를 보내던 덴하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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