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4~28일, 여행 337~341일, 코스타리카 산 호세
생각지 못하게 일찍 코스타리카에 들어온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근교 도시의 투어를 즐김으로써 1~2일 정도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물론 돈도 그만큼 나간다). 그리고 그냥 코스타리카 수도인 산 호세에서 휴식 겸 정비를 하는 것. 생각보다 오랜 고민 없이 우리는 후자를 고른다. 우꾼은 이미 여행 1년 차가 지났고, 나에게도 여행 1년 차를 다가오고 있는 입장에서 북미에서 약간의 여유로운 움직임에서 벗어나 중미에서의 오랜만의 강행군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하필이면 니카라과에서 나는 SMTM6을, 우꾼은 심시티를 비롯한 고전게임을 만났으며, 코스타리카에 도착하고 며칠 동안은 폭우가 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착상태에 빠졌다. 이는 마치 초등학생 때의 여름방학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와 우꾼의 코스타리카는 방학이었다.
초등학생의 방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견학이 아니었던가. 밀린 방학 일기에 한 글자라도 적으려면 견학은 반드시 필수 코스였던 바, 그래서 방 안을 벗어나 산호세 도심으로 향했다. 코스타리카는 사실 중미에서도 손꼽히는 부곡이다. 코스타리카가 '아름다운 해변'이라는 뜻이라서 그런지,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탓인지는 몰라도 미국인들이 은퇴 후 살고 싶어 하는 나라로 항상 거론된다. 또한 중미 내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서 중립국을 자처하고 있고, 대형 바나나 농장 들과 관광수익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척한 나라다. 도심의 모습이나 버스의 모습들이 중미 여느 나라와는 확연히 다르며 잘 정돈되어 있고 치안도 안전하다.
견학의 최고봉은 박물관이 아니겠는가. 산호세 도심에 위치한 코스타리카 국립 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코스타리카 국립박물관은 과거 군사 기지로 사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코스타리카는 현재 군대를 운용하지 않는다. 경찰이 자위 방어를 대신 겸하고 있으며 국방비에 사용될 금액을 사회복지 자금으로 운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존에 사용되고 있던 군사 기지를 일부 허물고 그 자리에 지금의 국립박물관을 세웠다고 한다.
박물관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나비공원이다. 코스타리카는 전 세계에 분포하는 동식물 종의 5%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종 다양성이 풍부한 국가이다. 그중에서도 나비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진 국가라고. 그래서 나비공원을 운영하는지도 모르겠다. 날아다니는 나비들, 수박을 먹고 있는 나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박물관의 볼거리가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다. 다른 중미 국가들처럼 마야 인들이 남하하여 내려온 흔적도 그렇게 많지도 않고, 화산이 있다고는 해도 40여 개를 갖고 있는 니카라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 본인들도 그걸 잘 아는지, 국립박물관에서 주로 언급되는 것들도 현대사에 대한 것들이다. 최근 코스타리카의 이주/이민 현상이 도드라진다고 한다. 조금 잘 살만 하면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으로 이동하여 생활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와 교육 수준 때문에 영어도 다른 중미권 국가에 비해 잘 구사하니까 기회가 더 있지 않을까. 반대로 중미권 다른 국가에서 코스타리카로의 이주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국가적인 고민이 많다는 것이 국립박물관에 언급되어 있었다. 깊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은 만큼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국가로서 이런 고민은 더더욱 깊어질 것 같다. 하나 더 재밌는 볼거리가 있다면 Las Bolas, 영어로는 The balls인데 왜 만들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고 한다. 박물관에만 몇 개가 있고 지나가다 다른 국가기관 시설에도 하나씩은 있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의 '쓸. 고. 퀄(쓸데없는 고퀄리티)'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실 산 호세 최고의 볼거리는 바로 여기, Calle 17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어로는 17th Street쯤 되겠는데, 기획적으로 예술 벽화를 전시하는 거리였다. 재치 있는 벽화들이 많아서 한참을 머물러 보고,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방학에는 역시 볼거리가 풍성한 곳에서 보내야 한다!
일요일엔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고, 방학엔 그냥 요리사가 된다. 한국에서도 방학이 되면 친구들을 불러서 간단한 요리(라면이라던가, 라면이라던가, 라면이라던가)를 해 먹는다던가 고기를 구워 먹는 등 요리하기를 원체 좋아하는 나이다. 여행 중에 요리는 떼려야 뗄 수 없지만, 보통은 늘 해 먹는 요리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코스타리카의 중미 방학에서는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요리라던가 재료가 없어서 요 몇 달 못했던 요리들을 주로 했다.
숙소 근처에 월마트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국스러운 고춧가루는 아니지만 매운맛의 고춧가루를 구할 수 있었고 그를 이용하여 고추장을 만들었다. 그걸 이용해 비빔밥도 해 먹고, 제육볶음도 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밀가루를 직접 사서 칼국수 면을 뽑는다던가, 평소에는 잘 해보지 않던 매콤한 호박 볶음도 해보고 마침 토스트기가 있어서 멋들어진 햄치즈 토스트도 해 먹었다. 여행에서 이런 요리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인데 설거지는 언제나 귀찮다 :-(
팽팽 여유를 부렸지만, 사실 나나 우꾼이나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남미 내려가는 여행 준비도 해야 했지만 무엇보다 둘 다 인터넷 매체에 글을 올리고 있는 입장에서 여행 동안 밀렸던 사진 정리와 글 작성이 가장 시급했다. 그런데 밀린 걸 알면서도 나나 우꾼이나 컴퓨터 틀어서 글을 쓰기보다는 SMTM6을 본다던가, 고전게임 명작인 심시티와 프린세스메이커를 한다던가, 유튜브를 본다던가의 잉여 활동(!)에 더 집중했다. 떠나기 이틀 전부터 '야 우리 너무 논거 아니냐'며 급하게 블로그 글들을 폭풍같이 써댔더라랬다. 역시 방학숙제는 닥쳐서 해야 더 잘 된다고, 나도 그렇고 우꾼도 그렇고 밀린 글을 몇 개나 업로드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나나 우꾼에게는 코스타리카에서의 그 기나긴 며칠이 어릴 적 시간이 안 가던, 그리고 개학을 앞두면 시간이 미칠 듯 빨리 가던 방학과도 같은 나라로 기억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