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3일, 세계일주 2일 차, 홍콩
남의 집에 신세를 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님에 분명하다. 호스트가 잠들기 전까지 나도 쉽게 잘 수 없었고(내가 거실의 카우치를 쓰다 보니...), 화장실이나 주방의 사용도 호스텔만큼 자유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에 와서 남의 집 신세를 졌을 때의 좋은 점 중의 하나는 호스트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Hugo와 밤늦게까지 떠든 뒤 잠들었다. 8시에 나가기로 해서 7시까지는 일어나기로 약속하고. 애석하게도 나는 여행을 가면 아침형 인간이 되어 버려서 새벽 5시 반에 기상을 했고, 덕분에 빨리 준비를 마쳤다. 사실 오늘의 일정을 미리 들은 나로서는 마치 관광지를 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을 거라 하루를 예상했다.
일정 : 센트럴 -> 소호 광장 -> 미드 레벨 -> 홍콩 해양공원
Hugo는 직장인이기 때문에 아침에는 출근을 하고 오후에는 나와 점심을 같이 먹은 뒤 함께 낮을 보내기로 했다. Hugo는 홍콩 금융가의 중심부의 스태츄 스퀘어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 근처 적당한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져 Hugo가 소개해준 센트럴 서쪽의 소호 광장(SOHO Sqaure)을 가보기로 했다. 사실 도시 모습에 큰 볼거리를 느끼지 못하는 나로서는 랜드마크 점령의 느낌으로 소호로 향했다.(계획의 중요성을 다시 느낀다.) 나는 소호보다는 근처의 모습에, 특히 소호 광장 바로 옆, 굉장히 좁은 골목에 여러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모여서 시장을 이루고 있는 것에 눈길이 갔다.
내가 봤던 다른 나라들은 시장이 하나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 배치된 게 대부분이었는데, 여기는 골목 자체를 바탕으로 시장이 서있던 것. 그리고 이 골목을 나오면 고층 빌딩들이 있는 메인 스트리트로 나오게 되고 위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젊은이들의 거리인 SOHO로 연결돼서 굉장히 이색적인 풍경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나라를 가게 되든 여러 가지 이유로 시장에 환장하는 나로선 이 거리를 걸으면서 '역시 나는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싶었다.
소호 광장을 벗어나 조금 내려오면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구간을 연결한 에스컬레이터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 Esculator)가 있다. 소호 광장까지 올라가는 수고를 줄여주고, 고지대에 위치한 시민들을 위한 에스컬레이터인데, 긴 통로로 여러 개의 에스컬레이터가 계속 연결되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홍콩 골목골목과 약간 높은 곳에서 보는 홍콩의 거리들이 일품.
문제는 이 백미들을 보고 난 다음이 문제다. 이 에스컬레이터가 출발 전 간단하게 검색한 바로는 이 에스컬레이터가 20분 정도 방향을 바꾼다는 말을 들었다. 에스컬레이터 탑승 전 LED 전광판에도 분명 표시가 된다. 그러나 잘 알아둬야 할 것은, 방향을 바꾸는데 걸리는 시간이 20분 정도 소요되는 것이며 방향은 딱 하루 한 번만 바뀌는 것이다(영어가 짧은 나를 탓해야지, 방법이 없다). 내가 갔던 오후 시간은 올라가는 방향만 작동했고, 내려가려면 걸어서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 미드레벨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 미친(!) 구간을 걸어 내려올 용기가 없어서(핑계 같다. 세계일주 하려면 정말 많이 걸어야 하는데.) 미드 타워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미니 버스를 타고 센트럴까지 한 번에 복귀했다. 애석히 도 다시 만난 Hugo가 선택한 점심은 SOHO 광장 근처의 한 덤플링 집이었다는 것. 이럴 줄 알았으면 와이파이 되는 곳에서 연락이나 해볼 걸.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Hugo의 건강검진을 위해 병원(이 있는 고층빌딩의 한 층)으로 이동했다. 대기시간에 말하기를 공립병원이 굉장히 저렴해서 항상 대기가 길고, 본인의 경우 회사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개인병원(정확히는 주치의 개념)을 이용한다고.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다소 달랐다. 진료 후에 옷을 갈아입고 홍콩 섬 남부에 위치한 홍콩 해양공원(Hongkong Ocean park)으로 이동했다. 사실 여행 출발 전 Hugo가 "같이 Ocean park로 갈 거야! 무료 이용 바우처가 있거든."이라고 말해서 나는 우리나라의 오X월드를 떠올렸다.
혹여 워터파크로 생각해서 수영복을 챙겼다면 큰일 날 뻔했다. Hugo가 말하길 아쿠아리움을 보유하고 있으며 바다와 굉장히 밀접해서 오션파크라고 말하지 결코 수영장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고(사실 오X월드와 같은 위락시설은 해외에서 Water Park라고 한다고.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 이 날 나와 Hugo가 무료로 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인 개장 이후의 시간 (약 오후 5시부터 오후 11시까지의 시간)을 Hugo가 다니는 회사가 Family day라고 해서 통째로 빌린 것.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복지라고 생각하며 케이블 카를 타고 입구 건너편의 다른 지점으로 이동했다. 케이블 카를 타면서 서로의 직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결론적으로는 한국의 기업문화와 홍콩의 기업문화는 생각 외로 많이 닮아있다는 점. 특히 해고가 잦고, 개인이 회사에 희생해 주기를 바라는 풍토가 다소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너네는 복지가 좋잖아. 이런 이벤트도 있고... 삼성 같은 큰 기업도 이런 행사를 자주 하지는 않고, 오히려 새로 생긴 회사들이 더 즐겨해."라고 말하자 이 놀이시설의 입장료를 말해주면서 별로 비싸지도 않은 것으로 굉장히 생색내는 "Showing"이라고 말했다.
도착한 반대편은 더 큰 테마파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홍콩 섬 남부의 부자 동네의 야경을 보며 타는 롤러코스터와 후룸라이드가 최고였다. 다시 돌아오는 케이블 카에서는 회사 얘기뿐 아니라 국가의 복지 얘기, 회사 동료 이야기 등을 하면서 돌아왔다. 화려한 야경 후 보이는 초라하고 음침한 홍콩의 거리처럼, 어쩌면 홍콩의 직장인들도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고 힘든 삶을 견뎌내는 것이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문득 나의 퇴사가―물론 단지 일이 힘들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그 앞에서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던 중, 오늘 하루 관광을 하게 될 거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생각에 큰 깨달음을 얻으며 사진을 정리했다. 내가 지내던 삶을 떠나면 그것 자체가 여행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1. 사실 Hugo가 "넌 어떤 계획도, 준비도 하지 말라"라고 했기 때문에 어제도 하루 종일 밥도 사주고 이것저것 알려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아침은 옥토퍼스 카드로 각자 계산하라고 하자 내심 뜨끔했다. 사실 염치없는 거지만 그래도 얻어먹어서 너무 행복했는데... 겨우 빵 하나를 내 돈으로 사 먹은 것이면서도 앞으로 돈은 네가 내렴이라고 말할까 봐 쿵쾅쿵쾅 했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많은 대접을 받게 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미안하고 나 스스로가 옹졸하다고 생각됐던 하루였다.
2. 음식에 대한 글은 사실 따로 쓰려고 했지만 이건 왠지 꼭 적어야 할 것 같다. 저녁을 홍콩 해양공원 내의 맥도널드에서 먹었다. (왜 그것을 먹었냐고 물으신다면 난 객식구니까...) 그런데 Hugo가 자기가 배고프다며 추가로 시킨 음식이 바로 맥도널드 전설의 메뉴 '애플파이'였다. 한국에선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애플파이... 먹으면서 감동했다. 애플파이 하나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