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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May 04. 2020

고향에 새봄이 오다

감정 들여다보기

대학교 1학년 때 방송되던 드라마 <서울의 달>의 주제가 중 '서울 이곳은'의 첫 소절은 이렇다.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 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서울에서 만난 나와 같은 처지의 지방출신 동료들과 재미삼아 노래방 레파토리로 삼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다.

살다보면 한참이 지나고 그곳을 떠나고 나서야 얼마나 좋은 곳이었는지 알게 되는 장소가 있다. 대학시절 하숙의 집은 정겨움이 있었고, 원당의 옥탑 자취방은 별을 보는 정취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 최고의 장소는 바로 나의 고향이었다.


코로나 19로 제법 오래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가족들과 고향 나들이를 나섰다.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래될수록 마음 한구석에도 노부모에 대한 걱정이 같이 자라서 찜찜한 구석을 털어내고 싶었고, 또 이맘때 고향의 봄 그림이 그립기도 했었다.
나의 고향 동네는 몇 해 전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유명 인사들이 출연한 이후로 더 유명해진, 이른바 핫플레이스이다. 천년의 고도 경주, 그중에도 문화 유산이 가장 밀집해 있는 황남동에 고향집이 위치해 있다. 과장을 보태서 자랑하자면, 이름 모를 왕과 귀족들의 대릉원과 잘 정돈된 잔디밭이 앞뜰처럼 펼쳐 있고, 첨성대와 천마총, 조금만 더 걸어가면 기막힌 야경의 안압지까지, 내 돈 한 푼 안들이고도 의미있는 조형물과 세련된 산책길이 개인 공원마냥 바로 앞에 놓여 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황리단'길이 생겼다. 내가 있던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불린 적 없었던 낯선 이름이 붙여졌고, 그곳을 다녀온 지인들이 고즈넉하고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고 왔다며 엄지척을 날려준다.
사실 이 동네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 방송 이후로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의 때가 묻었던 허름한 집들을 허물어서 깨끗한 한옥의 게스트 하우스가 되었고, 자주 가던 정육점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빵집으로 바뀌었다. 동네 목욕탕은 뼈대만 남은 채로 스테이크를 먹는 레스토랑으로 변신했고, 제법 큰 길가에서 담배도 팔던, 특히나 고장 난 게임기가 많아 불만이 많던 동네 오락실은 나름 유명한 카페가 되어버렸다. 방송 이후 방문할 때마다 건물의 변신이 하나둘씩 일어나더니, 어느 순간 동네 전체가 리모델링되어버린 셈이다.


주민자치센터 주변이 황남동이며, 한때 이곳도 모두 잔디밭이 깔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큰 위기가 있었다.
천마총을 중심으로 보면, 북쪽은 시내 중심가가 위치해 있고 서쪽은 단독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다. 동쪽에는 황오동이 있는데, 특히 이 동네를 전부터 쪽샘이라고 불러왔다. 동네 입구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물이 쪽빛을 띄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남쪽 방향에 내 고향집이 있는 황남동이 자리잡고 있다. 나도 중학교때인, 80년대 후반 즈음에 이사를 오긴 했지만, 이 황남동은 그 전 까지만 해도 경주에서 제법 잘 나가는 곳 중 하나였다. 황남초등학교는 1940년도에 개교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6.25 전쟁을 겪으신 아버지 형제들의 말에 따르면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세에 밀려 허덕거릴 때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한 애국의 학교이기도 하다. 시장도 하나 있는데, 경주의 남쪽 지역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장을 보러 올 만큼 상권으로도 준수한 곳이기도 했다.

경주는 문화재 보호와 관광특구의 컨셉에 따라 개발이 제한된 곳이 많다. 예를 들어, 건물의 높이 제한이 있다거나 지붕모양은 반드시 기와가 덮여있어야 하는 식이다. 이 정책 때문에 우리 동네는 더 이상 투자되지 못하고 정체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인구도 줄게 되었고 고령화가 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천마총의 동쪽 황오동도 마찬가지였다. 황오동은 경주시의 개발 방향성에 따라 동 전체가 갈아 엎어져서 '쪽샘지구'라는 관광지로 바뀌었고, 거기 살던 사람들 모두가 이사를 가게 되었다. 황남동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당시 우리 집도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을 해야 했다. 다행히 이후에, 귀인(내게는 귀인이 맞다)이 나타나 대구의 김광석 거리나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개발하자고 주장했고, 그것이 호응을 얻어 지금의 황남동, 황리단길로 되었다고 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동네 산책을 나섰다. 살짝 빗나간 이야기지만 경주와 아내의 이야기를 해본다. 대한민국 최고의 핫플레이스에 시댁을 둔 아내, 이 아이러니함 때문에 아내에게 경주는 힐링보다 고단의 장소이다. 굳이 말안해도 이제는 알고 있어서 늘 미안하고 마음에 걸려왔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마음이 있지만, 아직은 시간과 체력과 마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그래도, 상황이 허락할 때는 이날 처럼 길을 나서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지난밤의 북적임에 비한다면, 둘이 거닐기에 너무나 적당했다. 사람도 없고 햇살도 따스해서 동네를 살피기에 더없이 좋았다.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며 내 지난 과거들을 전했다. 이쁜 인테리어의 가게나 골목 풍경이 마음에 들면 핸드폰으로 담기도 했다. 이 집과 저 길에 얽힌 이야기들, 당신 남편이 여기서 무얼 했는지,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상대의 궁금함은 별개로 묻힌 기억들을 더듬었다.  

조금 지나니 아쉬움이 일었다. 동네가 너무 바뀌어버린 것이다. 비단 건물만이 아니었다. 시장에 나물을 팔던 할머니들의 모습과 사투리를 볼 수 없게 되었고, 방앗간 아저씨도 어디 가셨는지 알수 없다.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던 문방구 아저씨는 그나마 아직 계시는데, 그때의 여유로운 느낌을 찾을 수 없다. 학생수가 줄어들어 장사를 접어야겠다고 하신 말이 있는데, 이제는 관광객들에게 추억의 식품과 장난감을 파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골목마다 차량들도 넘쳐났다. 잠시라도 외출을 나갔다가는 우리 집 대문 앞에 내 차도 세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덕분에 외출은 그냥 걸어서 다니거나, 사람들이 빠질 시간에 맞추어 느지막이 나가게 되었다. 떠오를듯 말듯한 기억의 희미함과 많은 사람들과 붐비는 차량 때문에 아늑함을 잃어버린 고향의 모습에 뭔가 약탈당한 기분마져 든 것이다.

꾸불꾸불한 옛 골목길과 기와집들이 가게로 바뀌었다
여긴 무슨 가게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으스스한 담벼락에 포토존이 생겼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골목길과 뒷집의 모습

회사 선배가 말했던 고향에 대한 아쉬움이 떠오른다. 서울 출신이라는 그 선배와 고향 이야기를 하다 보면, 희한하게 시골 촌놈인 내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게 많았다. 개울가에서 노는 법이나 여름에 멱감고 겨울에 썰매 타는 기억들을 말할 때면, 이 사람이 과연 서울 사람일까 싶기도 했고, 서울이라고 다 서울이 아니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선배는 고향을 잃었다고 했다. 구파발에서 북한산 쪽으로 가면 진관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자기 고향이라고 했으며, 은평 뉴타운 개발 덕분에 고향이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통째로 사라진 마을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그 이후로는 가지 않았다고도 했으며, 본인은 실향민이 되었다.


기억이란 시간과 공간이 조합하여 담겨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잊혀졌다가도 그때의 공간을 보다 보면 다시 그 시간까지 떠오르는 게 기억의 작동법이기도 하다.
고향에 왔을 때, 사람들이 흐뭇한 이유는 친숙함이 가져다주는 저마다의 기억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선배에 비하면 나는 훨씬 낫다. 변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열심히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어슴푸레 나오는 것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 <경주>는 경주의 풍경을 잘 담아 놓은 편이다.
박해일이 신민아를 자전거에 태우고 가는 모습의 포스트는 내가 기억하는 경주와 많이 겹쳐진다. 그럼에도 영화를 볼때 다른 기억이 겹쳐지며 아쉬웠다. 허름한 기와집들 사이의 담벼락에 있던 낙서가 생각났고, 큰 무덤들 사이에 아무렇게 자라던 익숙한 들꽃들도 떠올랐다. 잘 생긴 배우들보다, 익숙한 동네 주민들이 더 어울렸다. 영화인데 사욕을 넣은 아쉬움이었다.

내 고향을 방문한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웃는 모양으로 볼 때,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작정한 웃음이 맞다.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는 담쟁이를 보고, 솜씨 좋은 사람이 잘 그려놓은 담벼락 그림을 배경으로, 제법 큰 돈을 주고 놓아둔 조형물을 신기해하고, 서울식(?)으로 세련되게 리모델링된 가게 앞에서 연신 웃고 사진을 담고 있으니, 내가 아는 황남동의 모습으로 웃는 건 아니다.

그래도 찾아와서 즐거워 해주니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고향을 나눠줘야겠다.

이제는 나 혼자의 고향이 아니고, 내 고향에도 새 봄이 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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