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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Apr 26. 2020

시시포스의 형벌

감정 들여다보기

신화가 허무맹랑한 이유는 공상 과학과 막장 드라마를 섞어 놓은 듯한 비현실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선배 현자들이 신화를 언급했고 지금 시대 사람들도 각자의 사건을 신화에 비추어 해석하곤 한다. 이는 인간 삶의 여러 범주들이 신화가 담고 있는 상징성과 대응되기 때문이다.

 


시시포스의 형벌


제우스가 강의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유괴하는 것을 시시포스가 목격한다. 잃어버린 딸을 필사적으로 찾으려는 아소포스를 보고, 시시포스는 그가 지배하는 도시샘물이 솟아나게 해주면 도와주겠다는 조건으로 독수리 한 마리가 아이기나를 안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알려준다. 이에 화가 난 제우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어 시시포스를 저승으로 데려가라고 명한다. 꾀 많은 시시포스는 타나토스마저 속여 토굴에 감금시키는데, 죽음의 신이 없어지자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 되었고, 신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해내고, 풀려난 타나토스가 시시포스를 저승으로 데려가게 된다.
시시포스는 이 또한 미리 알고 있었다. 아내에게 절대로 자신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미리 당부한 덕분에 지상에서 시시포스의 장례가 치러지지 않았다. 이를 상하게 여긴 하데스가 시시포스에게 물어보니 아내의 부덕한 행실을 하며, 자신을 지상으로 보내주면 아내를 벌한 다음에 돌아오겠다고 한다. 하데스는 시시포스를 돌려보내 주었으나, 약속을 어기고는 오래도록 장수한다.
제우스를 분노케 하고, 하데스를 속인 대가는 혹독했다. 그의 교활함을 알게 된 하데스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가한다. 무거운 바위를 산으로 밀어 올려야 하며, 정상까지 밀어 올렸어도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또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끊임없이 반복하는 지옥의 형벌을 내린다.


우리 사는 일을 지옥 같다고 말한다.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 그 고단하고 허무하고 끝이 없는 단순함을 우리 일상에 비유하는 것이다. 시시포스의 마음으로 들어가 보면 그렇다. 산비탈에서  바위를 굴려 올리는 고단함, 애써 밀어 올린 바위가 내려오는 것을 버텨내는 일의 덧없음, 기껏 올려놓은 바위가 굴러 떨어져 다시 올려야 하는 허무함은 끝없이 반복되는 우리 일상의 고민과 겹친다.

"시시포스가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노고, 단순한 덧없음, 단순한 끝없음 그 자체가 아니다. 시시포스의 형벌이 의미하는 것은 그 세 가지가 모두 합해서 만들어지는 가공할 괴로움이다."

-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에서 -


나의 지난 시간들을 시시포스의 마음으로 들여다본다.


학창 시절

하지 않으면 체벌이 뒤따르던 숙제가 매일매일 부여되었다. 인생을 결정한다며 무거움으로 대하는 시험은 때가 되면 통과의례처럼 맞이해야 했다. 졸려도, 엉덩이에 땀이 차도, 참아내던 수업과 야간자습도  시절의 무한반복 밀어내야 하는 바위였다. 그래도 그 고단한 시간을 버티게 만든 것은 대학까지만이라는 감언의 약속이었다. 개인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던, 일방향적 규칙과 강압이 지배하던 시간들.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고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군대 시절

규율의 엄격과 강제, 무한반복이 시시포스 형벌의 특징이라면, 6시 기상, 10시 취침의 군대를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꼰대 고참의 존재감, 비합리적 지시와 얼차려같은 예측불허의 불확실성은 고단함의 반복에 강도까지 더하기도 한다. 시간의 축적 정도로 인간의 등급을 매기는 계급제도도 있다. 최저 등급의 훈련소 시절이 커다란 바위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고, 계급이 올라가면 바위 크기가 줄비탈 경사도 완만해지기도 한다. 시시포스의 노고와 덧없음의 형벌은 군대와 아주 잘 어울린다. 그나마 2년이라는 끝있음이 있어 다행히 위로되었다.


직장 시절

내 직장 초기는 갑질로 점철된 시기였다. 프로그래머로서 회사의 업무 시스템을 개발해주는 역할은 어느 고약하고 꼰대 실무자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했다. 퇴근 무렵 호출해서는 이것저것 개발해 달라고 요구하고는 다음날 아침 출근 후에 보자는 식이었다. 온갖 갑의 언어들을 쏟아내면서 말이다.

사람에 대한 분노, 계약관계에서 오는 어찌할 수 없는 구조, 모니터 뒤에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 오류의 답답함, 매일 는 갑의 언어까지, 직장에서 겪게되는  일들은 시시포스의 마음에 어울릴만한 일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마흔 중반에 도달했다. 인생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치고, 그것을 지혜라고 믿어가며, 무엇이라도 더 해내기 위해 끙끙대는 시기가 지금이다.
남편으로, 아빠로, 아들로, 사회인으로, 친구로, 동료로 그리고 나로서 산다.

도대체 몇 명의 시시포스로 살아가고 있나?

고단함, 의미, .
시시포스를 이해할 것 같기도 다.


모두의 어깨에 바위가 놓여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 바로 전 따뜻함에서 떨어진 고통 때문에 그렇게 운다고 한다. 하지만, 자라면서 우는 빈도가 줄어들고, 또 어느 순간이 되면 눈물마저 말라버리기도 한다.

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안 아파서가 아니라, 울어봐야 소용이 없어서이다. 고되고, 덧없고, 끝없이 느껴지는 고민들이 일상에 이어지면, 인생은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착각이다.

시시포스의 마음을 다시 보면 우리보다 훨씬 열악하다. 무거운 바위는 오로지 혼자 감내해야 하고, 바위 미는 일은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우리 일상은 다르다. 같이 밀어주는 동반자가 늘 있고, 그 바위 무게의 가치는 부여할 수 있으며, 산의 정상도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바위가 다시 굴러내려 간들, 또 다른 동반자가 나타나고 또 다른 가치를 부여하며, 그 산에도 끝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은 시시포스의 형벌이 아니다.
나의 지난 시간들도 마찬가지로, 한 번도 시시포스가 된 적은 없다.


사는 일을 형벌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다. 제우스에게 하데스에게 잘못한 일도 없으니, 시시포스의 형벌은 단지 시시포스의 일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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