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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May 10. 2020

어린이 날, 게임만해도 오케이!

아빠 일은 처음이라

어린이날 저녁, 내 마음은 두 가지가 아쉽다.
그 하나는 아이들의 어린이날이 그저 그렇게 지나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나긴 내 황금연휴도 오늘로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아쉽다는 감정의 본질을 따라가 보면 '하고 싶었던 어떤 것', '해야 하는 무엇'에 대한 공허함이다. 오늘 저녁의 아쉬움은 '녀석들과 놀이동산이라도 다녀왔어야 했는데...', '긴 연휴 동안 동해 바다를 보고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 때문인 것 같다.



12살 아이들이 아빠에게서 멀어지긴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꼬맹이들은 어디를 가자해도 오케이였다. 그 장소에 가서도 진심으로 신나 했고 즐거워했었다. 조금의 노력을 들여 우스운 몸짓으로 거들면 자지러지며 웃어댔다. 그때의 웃는 얼굴과 환호성의 데시벨은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이 크고 행복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녀석들의 웃음이 여기로 데려와줘서 고맙다며 칭찬하는 것 같았고, 내 마음속에도 이 정도면 괜찮은 아빠가 된 것처럼 나 홀로 찬으로 만족했다.

"그냥 집에서 있을래요."

어린이날인 오늘 아침에 어디 갈까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집에서 게임하며 하루를 보내겠다는 말이다. 원하는 곳을 말해줬어도 갈 수 있을지는 또 다른 고민이지만, 아무 데도 안 가고 게임하고 싶다는 말이 마냥 서운하긴 했다.

승낙해놓고도 마음이 들쑥날쑥이다.
'이제는 외출보다 게임이군'
'그래도 좋은 아빠는 하루 종일 게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닐 텐데.'
'에잇. 그래도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그 시기에는 오락실이었잖아. 어린이 날이니, 내버려 두자.'
오전 동안 뜻대로 내버려 두다가 결국에 아이의 소원을 깨버린다. 식사도 할 겸 동네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게임에 몰두하던 아이는 망설이다가, 그래도 내 표정을 살피더니 쭈뼛쭈뼛하니 하던 일을 접고 따라나섰다.


봄꽃으로 가득 찬 산책로를 들어서자 답답한 기분이 나아졌다. 나만 그럴까 했는데 다행히 그것도 아니었다. 담벼락에 들러붙은 담쟁이들을 자세히 살피고, 만개한 철쭉과 듬성듬성 피어있는 민들레들, 겨우내 삭막해있던 나무와 풀들이 어느새 자랐다며 한 마디씩 한다. 민들레 홀씨를 불며 노는 모습이 게임기 만지는 모습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산책을 마치고 아이들이 원하는 메뉴로 식사까지 하고 나니, 나오길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가 베란다에 허브를 심어볼까 해서 적당한 화분을 고르려고 마트에 들렀다. 그런데, 이때부터 아이의 거슬린 반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며 불평 섞인 톤의 말이 들리더니, 이내 몸을 꼬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몸짓에서 아이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얼른 쇼핑을 마치고 들어가 게임을 하고 싶다는 농성처럼 보였다. 의도를 알아차리니 지켜보던 나도 덩달아 동요되려고 했다. 그것도 못 기다리고 떼를 쓰는지, 한마디 하려다 참는다.
'그래도 오늘은 어린이날이었지.' 아침에 결심한 마음이 떠올랐다.  

못 들은 척, 못 본 척으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춘기를 잘 넘겼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아이가 전과 다른 반응을 보일때는 혹시 사춘기가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예전에 회사 지인이 심리학 강의에서 들었다며, 사춘기에 대해 알려준 적이 있다. 사춘기에는 아이의 머릿속 세포들이 헝클어졌다 재배열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많은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인터넷과 유튜브 같은 매체를 접함으로써 생각이 급격히 변하게 된다고 했다. 이때 부모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것이 바로 존재감의 변화이다. 그간 아이의 머릿속에 90%를 차지하던 절대자 부모가 10%도 안 되는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시기가 사춘기이며, 그 혼란스러움 때문에 당황한다는 내용이었다.

마트에서 징징거리던 아이의 억울함을 글을 쓰면서야 알아챈다. 머릿속 세포의 재배열이라는 사춘기 이론이 아니더라도, 따지고 보니 아이가 지극히 논리적이었던 것 다. 오늘같이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특별한 날에, 이날만큼은 실컷 게임을 하며 보내고 싶다고 아침부터 선언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의도와 상관없이 산책을 나와야 했고 쇼핑을 따라다닌 셈이었다. 산책은 아빠의 일, 쇼핑은 엄마의 일이었으니, 어쩌면 되려 감사받고 사과받을 일이었다. 떼쓴다고 혼냈다면 얼마나 억울한 상황이었을까 .
아이가 어렸을 때 잘 따라다니던 것에 비해 지금 달라진 것도 납득이 간다. 아이가 성장하고 경험하면서 눈높이는 달라진다. 모든 게 새롭던 아이는 산책도 쇼핑도 놀이가 될 수 있었다. 길가에 피어난 꽃들과 초록색 나무들도 어린아이의 눈에는 낯설고 신기한 시기였다. 마트에서 진열된 물건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알록달록하고 온갖 모양의 물건들이 정체를 모를 때에는 모두가 장난감처럼 생각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12살짜리 녀석들은 봄꽃을 이미 몇 년 동안 경험했고, 마트에 진열된 물건들도 본인들에게 도움 안 되는 그저 그런 것인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익숙한 산책로, 의미 없는 남들의 물건일 뿐이다.

산책을 따라가고 마트에 기다리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양보했던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의 세포가 재배열된다는 이론도 일리가 있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면 "칼 같은 논리"로 말할 줄 알게 되는 시기가 되는게 아닐까 싶다.



온종일 게임하는 아이들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다.
녀석들이 즐거운 것은 좋지만, 다른 일로 즐거웠으면, 성장에 도움이 되는 다른 일들로 즐거웠으면, 이왕이면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즐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것도 어른의 욕심이다.
오늘은 게임이 가장 즐겁다고 했으니, 특별한 날인 오늘 정도는 그래 줘야 하는 게 맞겠다.
아이가 원한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그것도 아이에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참는 것도 하는 일이니까.

"어린이날 정도는 온종일 게임해도 오케이!"
내년 어린이날에는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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