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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Jun 06. 2020

술 한잔 하고 싶었어요

감정 들여다보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혼란스러웠다.

이런 사과는 처음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고 했을 때 그는 오래 담아온 빚을 덜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렵게  나에게 공을 넘겼고 받을지 말지는 나의 몫이 되었다. 정말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그에 대한 믿음, 반면 차고 넘쳤던 그 미움들은 또 어찌할지...



10년 전 일이었다. 내가 담당하는 정보시스템은 워낙 변화가 많은 업무 영역의 시스템이라 할 일이 많았고 난이도도 높았다. 더구나 다른 부서로 이동한 직장 멘토가 만든 시스템이라 내 나름으로는 잘 관리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소스 프로그램 주석 하나하나에 박힌 정성만 보아도 멘토의 정성이 듬뿍 묻어 있어서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난 뒤 실무부서 파트너로 S과장이 다른 회사에서 왔다. 시스템과 회사의 절차 모두 생소한 S과장은 처음에는 나에게 의지하며 호의적으로 대해서 좋은 관계를 맺고 지냈다. 웃는 인상, 공손한 존댓말은 을들의 귀에는 부드럽게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이듬해에 S과장 팀에 괴팍한 새 팀장과 또 다른 고참 부장 하나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와 친하게 지내는 S과장이 못마땅했는지, 대하는 태도가 점점 고압적이 되어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회사에 새로운 방식의 대규모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업무 상황도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에 맞게 시스템을 개선해야 할 분량이 많았던 것에 비해 일정을 너무 촉박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야근과 주말 근무를 계속하면서도 약속된 기한 내에 맞추지 못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항상 긴급과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요구를 하면서 동료들도 지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나는 S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인력이 더 투입되거나 일정을 조율해달라며 사정을 전했다. S는 단호했다. 계약상 지금 조건으로 당신들이 해야 하며, 일정은 무조건 맞춰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휴가를 다녀온 다음 날이었다. 프로젝트 부서 인원들과 S의 팀장을 포함한 관련자들이 참여한 회의 자리에 앉았다. 프로젝트 팀은 지금 시스템이 불안정하여 업무에 지장이 있다는 불만을 말했고, 빨리 기한 내에 지원되었으면 좋겠다는 협조를 구하려는 회의였다. 팀장의 눈치를 보던 S과장이 말했다.  

"XX 부장님, 프로젝트 일정에 지장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요청하신 사항은 다 정리해 주었는데도, 시스템 운영팀이 그 일정을 못 맞추네요. 그리고 안 과장. 이 상황에 나한테 보고도 안 하고 가면 어떻게요? 이렇게 하니까 시스템이 이 모양이지요."

기가 막혔다. 프로젝트 팀의 요구는 애매했고, 정리했다는 내용도 고스란히 내가 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대신 풀어준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다니... 서운함을 넘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보고 없이 휴가를 다녀왔다는 말도 그랬다. 배려 없는 일정 때문에 탈이 난 몸을 하루 쉬다 온 것이었고,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계약상으로도 둘은 엄연히 다른 회사이고 상관도 아니니 보고할 의무가 전혀 없었다. 을의 자리에서 그냥 참고 있어야 하는 게 분하고 원통했다. 그때 바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아니 나 혼자서 건너버린 셈이다.

그 사건이 지난 몇 개월 후 나는 퇴사를 했다. 그리고, S과장이 있는 지금 회사로 전직을 하게 되었다. 퇴사의 이유에는 지인의 제의도 있었지만, S가 주는 회의감도 존재했다.


공교롭게 S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중이다. 지나치며 종종 얼굴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몇 번을 마주쳤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웃으며 인사했지만, 웃지 않았다. 올해 S가 팀장이 되었을 때에도,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축하하지 않았다.

몇 개월 전 S팀장과 협업 과제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하는 상황이 되었다.

과제의 킥오프를 축하하는 회식이었다.


"안부장, 정말 예전부터 술 한잔 하고 싶었어요.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때 내가 왜 그리 여유가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눈에서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왔다.

말이 안 나와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 잠시 동안, 오래된 미움들도 꿈틀거렸다. 진심으로 사람을 미워하게 했고, 함부로 마음을 열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알게 해 주었으며, 웃는 얼굴과 공손한 말투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 퇴사라는 삶의 변화를 주었고, 내 선배와 동료들이 내 등을 토닥거리는 수고로움을 해주게 했던 사람이었다. 증오에 찼고, 언젠가 되돌려 줄 기회가 있을 거라고 다짐하게 만든 이의 사과를 받는 순간이었다.


"아 네. 상황이 그랬으니 그럴 수도 있죠 뭐. 저는 다 잊었어요"



너무 오래된 미움이라 녹지 않는다.

크게 져버린 믿음이라 의심을 져버릴 수도 없다.


반면, 또 다른 한편은 녹아내린다.

10년의 괴로운 시간이 있었겠구나, 양심의 짐도 있었겠구나 싶다.
나와 지나치며 나눈 몇 번의 눈인사 뒤에는 술 한잔 하자는 말을 못 한 그의 마음이 밟힌다.


그의 술잔을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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