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종종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한다.녀석들 눈에 아빠는 사고 싶으면카드로 뚝딱 사고, 가고 싶으면 운전해서 가고, 무엇보다 녀석들이 제일 부러워할 핸드폰 게임과유튜브나 영화 보기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슈퍼맨 같은자유를 부러워할 것 같다.
하지만, 녀석들이 알지 못하는 어른 세계도 있다.
혈액검사와 CT로엄마가 병원 오는 날이었다. 어제 오후,열차 앱에서 기차표를 끊고 시골에 전화를 넣었다. "엄마요. 10시 51분 출발하고요. 17호차 4B입니더."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몇 번을 말한다. '17호차, 4B'라고 대여섯 번을반복했던 것 같다. 엄마는 17호를 7호라 말하기도 했고, 4B와 4D를 헷갈리기도 했다. 그래도 몇 번을 불러주다 보면제대로 전달되는 걸 알기에, 엄마 입으로 두 번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머리 혈관이 막혀서 생긴다는 뇌졸중, 이 몹쓸 병이 엄마에게 찾아온 지 3년 되었다. 집안의 모든 제사들을 줄줄 꿰차던 슈퍼기억은 그 뒤로기능을 멈췄다. 서울 큰 병원 외래 일정이있을 때는 어제처럼전화와씨름을 한다.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라며 마음을 달래면서 엄마와 변화된 관계도 서서히 일상이 되어가는 중이다.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 오전 업무 시간 동안은 초인이 되었다. 몇 시간짜리 작업분량의 보고서를 뚝딱 해치웠고, 팀장에게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는 회사를 나섰다.
밖이 후덥지근했다. 지루한 장마가 잠시 그친 틈에 구름은 엷어졌지만, 그 구름 뒤의 태양 열기는 도시를 끓이는중이었다.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공기에다 오늘은 기온마저 제법 올라등과 이마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투덜거릴 여유가 없었다. 혹시 늦을까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이동했고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했다. 마스크 안 콧잔등은 땀으로 가득 찼고,코로는 가뿐 숨을 헐떡였다.
'이 몹쓸 놈의 코로나'
손등으로는 연신 이마를 훔쳐냈다. 곧 기차 도착 안내가 들렸고, 나는 9번 플랫폼, 17호차출입문 앞에 멈춰섰다.
맨 앞사람을 봤다.걱정이 많아진 엄마는 언젠가부터 기차에 내릴 때는 매번 맨 앞에 내리기에, 오늘도 맨 앞사람을 쳐다보았다.아니었다. 더 급했던 사람이 있나 보지 하며, 바로 뒤를 봐도, 또 그 뒤를 봐도 엄마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뭘 하시느라 늦었나 보다.'
한 사람 내리고 또 다른 사람이 내렸다. 줄줄이 내리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마지막 사람까지 내렸다. 이내 주변 다른 칸들도 둘러본다. 16호칸으로 내렸나? 아니면, 18 호칸으로 간 것은 아닐까? 이리저리 봐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열차 위로 올라가 보았다.
17호 4B좌석에는 아무도 없었고 객실도 텅 비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돌렸다. 신호만 울릴 뿐 받지 않는다. 평소 쓸데없는 전화가 많아싫다며 핸드폰은 늘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아 두는 시골 할머니.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제때에 받아야지.혹시 집에 놔두고 온건 아니겠지? 아니면 가방 어디에 처박아 두었으려나? 아휴 정말, 이 할머니... 핸드폰 좀 받지'
생각이 많아지며,마음도 동동거렸다. 발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플랫폼 출구 쪽 에스컬레이터로 바삐 뛰어가서 이 사람 저 사람 앞뒤 모습을 살폈다. 발 뒤꿈치를 들고 에스컬레이터의 위에서 아래로 쭈욱 살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기도 하고, 저 멀리에 아까 내린 기차의 출입구를 확인도 했다. 핸드폰 신호는 계속 울리기만 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등짝도 흠뻑 젖었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파묻혔다 이내 그 틈으로 보였다 하는 자그맣고 파란 옷의 실루엣 하나가 들어왔다. 여름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있었고, 왼다리를 살짝 절뚝거리며 걷는 익숙한 걸음이 틀림없었다. 빛바랜 파란색 블라우스 질감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못 보던 여름 밀짚모자를 눌러썼고, 키가 작아서 더 길어 보이는 장우산을 지팡이처럼 쥐고 있고, 어깨에는 내가 쓰다가 고향 집에 내버려 둔 회색의 가방도 매고 있었다.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에 비해 거북이 마냥 느릿느릿 걸어가는 할머니를 드디어 찾아냈다.
플랫폼을 나와 서부역 택시 정류장까지 손을 꼭 잡고 갔다.
"우리 아들 손, 따뜻하네."
그랬겠지. 엄마는 에어컨 빠방한 기차에 두 시간을 앉아 왔으니, 엄마 손은 시원할 수밖에. 반면 아들은 손에 땀날 일이 있었는데, 알기나 할까. 이건 뭐 엄마 찾아 삼만리도 아니고. "엄마요. 근데 오늘 어디 앉아 왔능교? "몰라. 아버지가 써준 대로 앉았지." 파란 블라우스의 가슴 주머니에서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10시 50분, 7호차 4D'
어제 그렇게 알려준 자리 번호를글자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다시 옮기면서, 저렇게 적어놓은 것이었다. 헛웃음과 함께,이 두 사람을 어찌할꼬 싶었다.
좌석번호를 더 꼼꼼히 확인해야 하나? 기차표를우편으로 보낼까?내려가서 직접 모셔올수도 없을 텐데... 현실의답을 찾지 못한 채, 택시 타는 내내 손을붙잡고 있었다.
어른도할 수 없는 일이널리고 널렸다.
아무리 해도 몸이 안 되는 어른이 되기도하고, 몸이 성해도 못하는 어른일 때도 있다.
가장 마음 아픈 사실이지만,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도 있다.
그럼에도 점점잘하는일이 있다면,잘 체념하는 방법과그 체념에서 좋게 바라보는 법이늘어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