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에도 아이는 시큰둥하다. 되려 더 크고 싶지 않다며 볼멘소리를 낸다. 적절한 아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이제 겨우 12살, 5학년짜리가 성장을 멈추면 어떡하냐며 토닥여주고 말았다.
그 이유가 짐작은 간다. 녀석의 하루가 그래 보인다. 개학이 연기되고 학원마저 문을 닫으면서 집안에 콕 박혀 있는 신세가 꽤나 길어졌다. 그러면서 매일이 반복처럼 돌아가는 중이다. 하루 할당이 정해진 학습지를 풀고 엄마표 영어 공부도 할 일이다. 몇 달 전 시작한 수학 학원은 바이러스로 쉬는 대신, 만만치 않은 수학 문제집을 숙제로 내놓았다. 거기에 내가 넌지시 밀어 넣는 독서 부담도 있으니 제법 빡빡해진 것이다. 아이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듣고 읽고 머리 쓰는 일로 보내고 있으니 피 끓는 소년의 답답함에는 일리가 있다.
여기에다 미래 걱정도 하나 더 얹혀 있을 것이다. 일전에 보고 들은 이야기들로 형이 되면 찾아올 괴담 같은 것들이다. 대치동 중학생 형들은 학원과 과외로 잠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같이 보았고, 고등학생 형들의 입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더 크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말은 이제 슬슬 세상 걱정을 시작하는 나이로 접어드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나도 더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에게 아이의 성장 시간은 앞과 뒤가 다르게 느껴진다. 언제 키우나 한숨짓다가도 또 언제 이렇게 컸냐고 놀라기도 하는 상대적인 시간이다. 눈도 뜨지 못한 옹알이가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고, 아장거리다가 뛰어다니는 과정들은 장면 장면이 새록하지만 연결해서 돌아보면 쏜살같다. 가끔은 아이와 보낸 어느 시점이 딱 꽂히기도 하는데,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특히 요즘 핸드폰의 어떤 프로그램은 너무나 친절하게도 '몇 년 전 오늘'의 제목으로 사진 한 묶음을 엮어 던진다. 그걸 보는 아내와 나는 한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음 지으며 빙긋이 웃곤 한다. 회사 후배의 돌잔치에서 찍은 자지러지는 아이 웃음, 자기보다 큰 키의 피아노를 보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보는 진지한 눈빛, 카메라에 지어주는 억지 브이와 찡그린 표정도 마냥 기분 좋고 울컥 이게 하는 기억이다.
아이의 말처럼, 지금 멈추는 것도 괜찮다. 자그마한 녀석은 12살 아이가 되어 벌써 얼굴도 허벅지도 엄마만큼이나 커졌고, 내 키를 추월해버릴 날도 불과 몇 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녀석들에게는 순수하고 귀여운 생각과 행동이 남아있는데, 이 마저도 오래 남은 것 같지가 않다. 요즘은 가끔 말을 가릴 줄도 알고, 슬슬 따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흔적이 사라지는 게 못내 아쉬워지는 중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대부분의 이유는 후회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두 가지 종류의 후회가 있다. 그 하나가 서투른 아빠가 저지르는 실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최근 들어 점점 더 커지는 감정이다) 그때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아쉬움이다. 만약에 돌아간다면, 토실토실한 아이의 볼살을 만져보고, 처음 옹알거리는 소리를 담아 놓고 싶고, 두 발 자전거 타기를 성공하는 부자의 성취감과 유치원 발표회에서 아이의 몸짓 손짓은 다시 음미하고 싶다. 아이의 딱 그 단계에서, 그때의 아빠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아이가 성장을 멈추고 싶다는 말과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생각에 그나마 위로해 본다면, 선(線)처럼 이어진 시간을 사는 우리에게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만큼은 제법 괜찮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괴로울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버텨라 지나가라는 다른 주문을 외우곤 하지 않는가. 지금이 괜찮으니까 시간을 멈추고 싶고, 행복한 기억이 있으니까 돌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