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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Apr 18. 2020

문을 열고 이야기를 만들고

[독서 생각]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의 책 <멀고도 가까운>첫 글 제목은 '살구'였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엄마와 아직까지 풀지 못한 감정들이 남아 있음을 고백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는 정상이 아닌 엄마이며, 오래된 감정의 응어리를 푸는 열쇠가 살구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살구처럼 사람들에게 어떤 물건이 특별한 의미가 되기도 한다. 물건에 담긴 기억이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로 문을 열고 나면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책의 느낌을 말하자면, 한적한 벤치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누군가의 이야기 같은 생각이 든다. 어떤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가 꼬리를 물며 이어졌고, 그러다 보면 처음에 무슨 이야기로 시작했지 하며 헷갈리기도 했다. 마음이 동동거릴 때 곁에 두고 읽으면 좋은 약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책에 담긴 많은 내용 중에서 내가 반응한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첫째는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삶이란 것은 '문'을 통과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언어를 되새겨 글로 남겨본다.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

내 글에서도 이야기라는 단어를 자주 썼던 것 같다. 같은 단어를 피하려고 비슷한 말을 찾아 쓰기도 했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란 뜻으로 사용했다. 일상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책의 이야기,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들 이야기까지, 소재는 다양했지만 모두가 글감에다 나의 느낌과 생각을 담아서 이야기를 썼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 때는 보통 마음속에 무엇이 일어날 때이다. 혼자 가지고 있기에는 아까운 생각과 특별한 느낌이 올라올 때 말이나 글을 쓴다. 각자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것들을 소재로 하는 것이다. 단순히 정보의 사실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전달은 별로 재미가 없다. 특히, 글은 새로운 것이 담겨 있을 때가 매력적인데, 그 새로움이란 것이 바로 개인의 것이다.

처음부터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잘 알고 있는 것이라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뉴턴이 중력의 존재를 발견하고, 갈릴레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 처음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창의적이거나 엉뚱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사람들을 반응시키고 공감과 인정을 받은 오랜 시간 후에야, 우리가 아는 상식과 법칙의 영역으로 자리 잡는 식이다.

도 끊임없이 내 이야기를 한다. 물론 상대에 따라 소재를 선택하지만, 어떤 상대는 어린 시절까지 내려가 이야깃거리로 삼기도 한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은 정해지지 않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좀 더 친절하게 하려고 한다. 물고기를 잡고 멱을 감고 친구들과 놀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그 사이 있던 자잘한 사연들과 생각들을 이야기하며, 지금은 아이들을 키우며 가족들과 지내는 이야기, 불편한 회사 이야기들도 한다. 모두가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것들로, 나의 이야깃거리가 된다.

삶의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문"

앞서 말한 것처럼, 이야기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다룬다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각자의 공간에서 있는 개인적인 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보자. 그렇다면 개인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간을 이동하며 살며, 그 중간에 "문"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문의 역할이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기능이라면, 사는 일도 어떤 과정을 통해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시골에서 스무 해를 살고 대학 진학과 함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자라온 곳이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 자전거와 두 다리만으로도 충분했고 사람과 어깨 부딪히는 일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배경인 서울은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하철과 버스의 낯선 수고로움이 있었고, 좁디좁은 땅을 나눠 서있는 요령도 필요했다. 나처럼 각자 다른 공간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서 균형을 잡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더 피곤해졌다. 서울 생활을 시작할 때의 에피소드들은 오래된 내 이야깃거리인데, 이후에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좋은 윤활유가 되어 주었다. 이때에도 익숙한 고향과 낯선 서울 사이에는 진학 (또는 성인)이라는 문이 존재한 셈이었다. 그 이후에 일어나 군대도 내게는 새로운 공간이고, 결혼과 아빠 되는 일도 새 공간으로 진입함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대개 낯선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행착오를 겪고 적응하여 이내 새 공간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산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고 기억에 남아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 그리고, 나의 상경기처럼, 자의든 타의든 간에 새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어떤 계기(또는 이벤트)가 있는데, 이를 "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섞어보면 "삶은 우주의 공간 어딘가에서 열심히 자기 이야기를 만들며 지내다가, 문을 열고 이곳으로, 저곳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책의 마지막 글 또한 제목이 '살구'였다. 마치 여러 방을 구경시켜주다가 처음에 왔던 살구의 방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이 살구 방은 내가 관심이 있었다. 지금 내가 가지는 고민과 비슷해서, 병로한 부모님과 관계 맺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책은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그리기만 했다. 결국 나의 열쇠는 되지 못했고 아무 귀띔을 받지 못한 채 끝이난 셈이었다.

작가의 엄마 일처럼 사는 일이 생각만큼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귀찮게 따라다니면, 마치 가시가 낀 것처럼, 까칠 거리고 아프고 또 잘 안 뽑혀서 내버려 두기도 한다. 그러다 곪아서 덧나기도 하고.
그럼에도 남이 사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위로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어찌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고 말이다.

자기 이야기를 만들며 이동하는 것이 사는 일이라면, 지금 할 일은 내가 있는 공간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리라. 좋은 방을 연결해줄 또 다른 문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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