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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Apr 21. 2020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독서생각]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당시 나의 상황에 놀랄 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


나는 민감한 이다.

어떤 사람은 예민하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 눈치가 빠르다고도 한다. 남들에 비해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정확하게 알아채는 감각이 있기는 하다. 민감한 감각은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자극을 받을 때면 사는 일이 고단해지게도 한다.


나는 감정적인 이다.

어떤 사람공감을 잘한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고도 한다. 누가 말했나, 어떤 상황이었나, 무슨 단어를 썼냐는 반응중요한 입력값이다. 그 결과로 마음은 날것 그대로 춤을 추고 내 판단의 기준과 반응하면서 희로애락이 일어난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스트레스이다.


나는 서투른 이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감정들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시도한다. 그럴 때 취하는 도구는 산책과 명상이다. 어떤 감정은 쉽게 정리되고, 또 어떤 감정은 삼켜서 감내할 수밖에 없다. 반응은 선택이 필요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단어와 말투로 전해야 할지, 또 어떤 몸짓과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준비한다. 망설이다 놓치기도 하며, 가장 편한 사람에게 조차도 '아차'하며 실수한다. 돌아서서 후회하기 일쑤다. 표현하는 일은 나의 가장 고민스러운 취약 능력이다.


인간의 반응 과정은 감지, 해석, 표현 세 단계를 거친다. 감각 기관으로 정보를 감지하고, 머리와 가슴으로 해석하며, 말이나 글, 몸짓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사람마다 독특한 패턴이 있어서, 한 사람을 구분하는 특성이 되기도 한다.  '그 사람답다'라고 말하는 정체성이다.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 "고통"은 이 세 가지 단계 해석의 영역에 해당된다. 타인의 일로 내가 고통을 받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사람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결과부터 확인한다.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고, 왜 일어났는지, 사건의 과정과 원인을 살피게 된다. 여기까지가 감지의 단계이다. 다음은 그 정보들을 경험과 가치에 비추어본다. 조금 더 해석을 잘하는 사람은 나아가서 상대의 입장으로 이입해 보는데, 해석 단계에 드는 불편한 감정이 바로 고통이다. 그다음은 마지막 단계인 표현이다. 해석된 결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선택하여 의사를 전달한다. 화내거나, 싸우거나, 울거나, 위로하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한때 같은 팀에서 일하던 동료 과장 A가 있었다. 팀에는 온갖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주무라는 역할이 있는데, 모임에서 총무 정도라고 보면 된다. 나와 같이 있던 시절은 그가 주무였던 해였다. 돌이켜봐도 정말 특이한 친구였다. 중요 업무나 일정을 놓치기 일쑤였고, 그 여파는 주변 동료들이 부랴부랴 빈틈을 메우는 응급 상황을 계속 야기시켰다. 급기야 팀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항의를 했을 때, 그의 반응은 어이없게도, '저는 그렇게 빡빡하게 안 살려고요'라고 넉살 좋은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여러 사람들을 애태웠고 예민하게 했던 시절이었다. 그 불편의 나날을 끝내고 해가 바뀐 연초에, 당시 같이 고생했던 팀 동료와 술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A과장이 우리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냐며, 발을 동동 구르는 자와 세상 편하게 웃음 짓는 자, 이 중에서 행복지수가 높은 쪽은 누구인가를 두고 안주거리로 삼았었다.


솔닛의 고통에 대한 정의를 빌자면 A는 무고통자 정도가 되겠다. 당시 그가 고통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건 확실했다. 반응의 3단계로 보더라도 그 어떤 단계가 오동작했는지도 알 수 없다. 애초에 감지 기능이 무딘 사람일 수 있고, 감지는 했으나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또 아니면, 감지와 해석을 하고도 표현 방식이 특이한 사람이거나.
어쨌든 간에 A의 무고통식 반응은 문제가 있다. 조직은 혼자가 아닌 같이 지내는 곳이 아니며, 나 홀로 무고통의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다. 더구나, 고통받는 주변 동료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개선 요구도 했지 않은가. 그 고통들에 대한 반응으로 빡빡함을 싫어한다는 답변은 한 몸이길 거부한 셈이다. 조직은 유기체이기도 하다. 유기체의 동작은 어느 한세포나 한 기관이 통증이 있으면, 유기체 전부가 긴장하고 방어하고자 한다. 어떤 세포 기능은 치료하려고까지 든다. 그래야 한 몸이다. 만약 그중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 세포는 유기체로 한 몸이 되기 어렵다. (유기체의 목적과 다른 목적으로 분열하는 세포를 암 세포라고 하지 않은가)



'고통을 얼마만큼이나, 어느 범위까지 느낄 수 있느냐'는 개인의 범위나 유기체의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 막으로 닫아버리는 순간, 그 경계의 바깥쪽은 내 몸이 아니게 된다. 그 반대로, 외부 고통을 확장하여 느끼고 받아들이는 크기만큼이나 내 삶의 범위는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자아의 경계가 당신이 느끼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면, 자신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계 안에서  수축할 것이다. 반면에 다른 이의 것까지 느끼는 이들은 확장할 것이며, 모든 존재에 공감하는 이들의 경계는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 리베카 솔닉 <멀고도 가까운> -


선을 긋는 사람이 될 것인가? 확장하는 인간이 될 것인가?

고통을 외면한다면 버리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죽은 것이다.

고통을 무시한다면 스스로 죽는 것이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으니, 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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