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통해 미래를 폴리싱하다
오늘은 카페인에 취해 잠이 안 오는 데다가, 밤공기가 선선하다 보니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 한다.
조금 상스러운 표현이겠지만, 내 인생은 정말 답이 없었던 그 자체였다.
물론, 욕심 자체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 술, 도박에는 손도 대지 않지만 말이다.
인생을 스스로 하드 모드로 시작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일 것이다.
5살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급성임파구성백혈병으로 주위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컸다.
엄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도 안 좋으셨던 건강에도 백혈병과 암에 관한 척척박사가 되셨고, 모든 삶을 나에게 바치셨다.
아버지 역시 일과 나의 간호를 동시에 하시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셨다.
동생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손길에서 벗어나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외갓집은 외손주의 안녕을 위해 늘 기도하시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나는 기적적으로 완치를 할 수 있었고,
병마와 싸움이 조금씩 줄어들 때쯤 아버지의 사업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그렇게 썩 순탄하지 않으셨다. 낯선 땅에서 일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 쉬우셨겠나.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있었고, 그럼에도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엄니는 그 와중에도 내가 잘 커주길 바라셨다. 다만, 조금은 엄격한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그 엄격한 지도와 관리하에 중국에서도 현지 학생들과 겨뤄 성적을 늘 상위권을 유지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2011년에 한국에 본격적으로 독립을 하여 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은 엄니와 아버지 하에 성장했기에, 나는 한국에 왔을 때 돈에 대한 개념,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법, 하다못해 맥도널드에서 주문을 하는 방법조차도 몰라 전전긍긍했었다.
초반에는 그리 잘 지내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것이 나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하나둘씩 나를 기피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나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 친구들과 난 여전히 징글징글하게 인연을 이어가며 가끔 만나 푸닥거리를 하기도 한다.
성실한 아버지, 자식 걱정에 늘 혈안이셨던 엄니, 좋은 친구들, 중국 생활 덕에 높아졌던 중국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나쁘지 않았던 학벌.
사실 인생을 하드 모드로 만들기도 쉽지 않은 조건들이다.
하지만, 독립을 하면서 나의 본성 속 감춰졌던 오만과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가 이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남들에 비해 쉽게 들어갔던 대기업이 시작이었을까. 나는 어디든 나를 원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연봉이 1년에 두 번 오른 적도 있고, 이력서를 올려놓으면 먼저 면접 보자고 하던 기업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숙했던 사회성에 일을 하며 얻었던 노동의 대가들을 흥청망청 쓰기 시작했다. 그것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말이다.
도박을 했나? 아니다. 사업을 했나? 아니다. 사실하면 안 되는 거지만, 차라리 그런 거라도 했다면 이해라도 되었을 것이다.
그저 돈 무서운 줄 모르고,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의 베풂이 많았다.
8년을 만났던 첫사랑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의 분수에 넘치는 것들에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월급쟁이가 월급을 다 쓰고 이내 카드론에 손대기 시작했다. 갚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계속 불어나고, 하다못해 철없이 은행 대출도 막 받았다.
첫 차를 60개월 풀할부로 이름 모를 곳에서 캐피털을 쓰기도 하고, 휴대폰 결제로 게임에 과금으로 한도를 꽉꽉 채우기도 했다.
정작 나에게 남는 게 없었다. 나를 위해 쓴 게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나의 하드모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용등급이 상위 99%라는 글자를 보자, 내 눈앞이 비로소 깜깜해졌다.
월급을 받았는데 현금이 안 돌 때도 그렇지 않았는데, 신용등급 10등급이라는 글자가 너무 무서워 보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은행의 돈은, 카드의 돈은, 통신사의 돈은 나의 돈이 아니었다는 것을.
신용회복을 신청했다. 그때가 28살이었다.
매달 성실히 연체 없이 납부를 했지만, 나의 오만함 때문에 퇴사를 반복했던 것 때문에 위기가 중간중간 꽤 있었다.
다행히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고 나는 다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퇴사도 습관처럼 반복하다 보니, 나의 불만들, 목표 의식의 부재, 인내심의 부재 등이 문제였다는 것을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비로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30살 이후였다.
나는 모든 신용회복 절차를 끝냈고, 점차 직장도 오래 다닐 수 있는 버팀목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에 나는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겠다 확신이 드는 여자를 만났다.
알뜰한 그녀 덕에 나는 점차 돈에 대한 중요성과 계획적인 소비의 중요성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이제는 모든 걸 다 저지른 뒤라 더 이상의 물욕도 사라진 채로 그저 소소한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두서없이 긴 스토리였다.
사람들이 나는 어떤 사람이냐라고 물었을 때는 나는 그렇게 답했다.
늘 뭣 되면서 배우는 사람이요
내가 인생을 하드 모드로 몰아넣었음에도, 더 하드 해지지 않았던 것은 뭣 되고 나서라도 깨달았다는 점 같다.
대단한 능력이 있진 않지만,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때는 대외적으로는 이탓 저탓을 했어도,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한번 나에 대해 돌아보았다.
결국은 다른 게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것인데, 나는 말이 너무 많았다.
실패를 해도 괜찮다고들 늘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근데 전제조건이 있다. 실패해도 괜찮다 해서 그냥 실패하면 안 된다.
실패를 하면 돌아봐라. 당신이 왜 실패했는지. 그럼 적어도 다음에는 조금은 더 나아진다.
게임도 서비스 종료를 하거나 개발을 중단하면 포스트모템이란 걸 한다.
성과는 어땠는지, 과정은 어땠는지, 모든 방면에서 재검토를 하여 그 회사의 경험으로 삼는다.
인생도 똑같은 것 같다. 미리 알아서 하드모드에 안 들어가면 상관없지만, 하드모드에 들어갔다면 계속 포스트모템을 해라. 그럼 조금은 더 일찍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삼진 마라. 단점을 완전히 지울 순 없어도 극복은 할 수 있다. 당신이 의식을 가지고 돌아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