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 잇기 (커피, 기억, 아쉬움)
며칠 전 스승의날. 고3 때 담임 선생님께 연락했다. 부담스럽지 않을 기프티콘에 “뵙고 싶어요”라는 말을 슬쩍 덧붙여서. 한참만에 온 선생님의 답장, “잘 지내지?”로 시작해서 “치과라서 말을 못 해”라는 끝맺음.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하지만 전화는 쑥스러워요“라고 속으로 답했다. 스승의날 학교장의 재량으로 쉬는 학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치과에 가셨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뭔가 조금 더 낭만적인 하루를 보내실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십 수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종종 선생님께 연락한다. 담임을 처음 맡은 선생님, 하필 고3이었다. 당시 미혼이었던 선생님은 때론 힘겨워 보이셨다. 우리 반빼고 다른 반 담인 선생님은 오랫동안 고3을 맡아오셨고, 그 틈에서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우리는 우리대로 수능에 대한 부담감을 어쩔 줄 몰라 곧잘 선생님께 투덜거렸고 그런 우리를 사촌언니처럼 도닥여주셨다.
어린 눈에 선생님은 멋지고 우아해 보였다. 그 우아함의 8할은 머리카락에서 나왔다. 굽실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카락이 걸을 때마다 찰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나도 대학 가면 머리부터 길러야지’하고 생각했다.
어느 여름날 수능 모의고사를 치고 친구들이랑 무서운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덕분에 밤만 되면 무서워 잠들지 못했다. 지금도 공포영화를 보지 못하는데, 그땐 겁이 더 많았다. 선생님은 며칠 퀭한 나를 보더니 “수민아 요즘 힘들어?”라며 걱정스레 물어보셨고, 곁에 친구들이”얘 무서운 영화 보고 밤에 잠을 못 잔대요 “하고 놀리듯이 말했다. 선생님은 “으이그”하고 교실을 나가셨는데 종례 시간에 오셔서는 그림을 하나 그려주셨다. ‘수민 수호천사’라고 이름이 붙여진 그림 뒷면에는 밤에 잘 자야 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메시지를 적어주셨다. 그림 속 나의 수호천사는 선생님을 닮아 얼굴은 하얗고 긴 웨이브 머리였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그림 속 천사는 흑발이 아닌 금발이었다.
선생님과의 추억은 하나 더 있는데,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 선생님은 결혼하셨다. 그 바쁜 와중에도 결혼까지 하시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선생님은 고향에서 결혼을 하셨고, 반 아이들 중 몇몇만 참석하기로 했는데, 나는 선생님과 깊은 마음을 나눴다고 혼자 생각했으므로 친하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섞여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나의 결혼식에도 선생님께서 와주셨다. 종종 연락드릴 때마다 “누구누구 결혼했다던데 왜 안 알려줬어? 너 결혼할 때는 꼭 알려줘”라고 하셨는데 정말 결혼식에 오셨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이시며. 그 이후로 스승의 날이면 종종 인사를 드리곤 하는 게 매번 더 큰 마음을 내어주신다.
선생님께 연락드렸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주말이 끝나감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 온 사진. 덕분에 달콤한 시간 보내고 계시다는.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 선생님은 더운 날에도 뜨거운 커피를 드신다는 것. 언젠가 커피가 맛있는 곳에서 선생님과 커피 한 잔 해야지라며 주말이 끝나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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