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 그런 말을 했다. “그 풍경을 보는데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때는 그랬어.” 나는 가만히 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아 그의 얼굴만 빤히 보았다. 그때 정은 홀로 일주일 동안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고, 피곤이 덜 가신 얼굴인데도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눈에 띄게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 그리고 명석한 두뇌까지. 정과 가깝게 지내던 20대 초반의 나는 선배인 정을 동경했다.
우리는 회사에서 만났는데, 당시 나는 인턴이었고, 정은 3년 차쯤 됐던 것 같다. 아닌가. 더 됐으려나. 정과 나는 서로 다른 층에서 근무했는데, 주로 여자 휴게실을 오가며 친해졌다. 인턴에게 친절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는데, 정은 휴게실에서 마주치면 “시간 되면 요 앞에 커피 마시러 갈래요?”하고 물어봐 주었다. 그때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 그저 정을 따라 커피숍에 갔다. 새까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먹는 정을 보며 속으로 ‘저걸 무슨 맛으로 마시지?’했다. 내 입에 아메리카노는 쓰기만 썼지, 별다른 맛이 없었기에. 지금처럼 커피를 마시기 전까지 누군가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하면, 나는 정이 떠올랐다.
정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인턴도 살뜰히 챙겼는데, 특히 나에게 더 잘해주었다. 세 명의 인턴 친구들이 더 있었는데, 내가 유독 잔심부름이 많이 해서 안타까웠나 보다. 이것은 순전히 자리 탓이다. 나는 문 가까이에 앉았고 그 때문에 오며 가며 나에게 “이것 좀 부탁해”와 같은 말들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오갔다. 딱히 그게 싫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정의 회사 생활도 쉽지 않았겠다. 예쁜 얼굴에 친절한 성품, 그건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좁은 회사에서는 누가 누가 만난다던데, 하는 말에 정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그게 아닌데. 내가 알기로 정은 딱 한 명의 선배와만 회사 밖에서 만났다. 그저 여러 남자 선배들이 정이 베푼 친절을 오해한 것 같다.
정과 나는 밖에서 자주 만났고, 휴가 때도 함께 영화를 보았다. 정이 밖에서 따로 만나는 K선배도 함께였다. K선배는 나도 아주 좋아했는데, 까만 불태 안경에 까슬한 수염 자국 그리고 까만 불태보다 더 까만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었다. 키도 크고 잘생겼지만, 곳곳에 우울을 묻히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둘이 만날 때면 왜인지 나를 자주 불렀다. 나는 정은 편했지만, K는 어쩐지 어려웠다. 그런데도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둘의 약속 자리에 함께했다.
어느 날은 회사 선배 몇 명과 밖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 부장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정이 만나는 사람이 누구야? 넌 친하니까 알지 않아?” 나는 이 자리에 없는 정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싫었지만, 정이 누구를 만나는지 지극히 사적인 것을 당사자도 아닌 나에게 묻는 건 아니다 싶어 “정 만나는 사람 있어요?”하고 되물었다. 그 부장은 ‘알면서 왜 그래’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더 묻는다고 해도 알려줄 마음도 없었지만. 그런 소문의 틈에서 정은 항상 자유롭지 못했다. 결혼이라도 해야 잠잠해질 판이었다. 왜 그럴까. 젊고 예쁘고 유능한 사람을 왜 못살게 괴롭힌 걸까. 어린 내 눈에 그게 너무나 이상했다.
그래서 정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대해서 말할 때 '용서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자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뒷말을 해대던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속으로 생각만 했다. 용서를 했는지 어쨌는지 모르면서 어떤 일인지 물을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말들에 상처받는 정에게 나까지 상처를 줄 수 없어 가만히 듣기만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정과 나는 연락이 끊겼다. 회사에 나오고 나서도 정은 나와 언니가 사는 자취방에 와서 며칠 자고 가기도 했다. 집까지 오가는 퍽 친밀한 관계였는데 이상하게도 갑작스럽게 뚝하고 연락이 끊겼다. 가끔 정이 보고 싶다. 정의 마른 손과, 다정한 품새를 다시금 가까이서 보고 싶다.
#다정하고친절한정 #그리운정
#책과강연 #백백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