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의미
늦잠을 잤다.
밤새 비바람이 심해 잠을 설쳤다.
태풍급 비바람이었다.
겨울철에 부는 삭풍도 아니고.
여름철에 부는 하늬바람은 상쾌한 바람이어늘
된마(동남풍)인지, 마파람(남풍)인지 모르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제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내일 아침 일어나면 제육볶음을 해놓고 9시 반 필라테스 운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제육볶음은 점심으로 미루고 바로 필라테스 운동을 갔다.
필라테스는 밥 먹듯 일주일에 두 번은 꼬박 거르지 않고 하는 나의 일상이다.
회사 다닐 때는 2인조여서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상대방한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여기는 6인이 같이하지만 편리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에도 여러 타임이 있고 앱을 통해 미리 예약할 수 있다.
그래도 아침 9시 30분 타임은 경쟁률이 치열하다.
보통 전주 금요일 오후에 차주 일정이 오픈되는데 일정이 오픈되자마자 9시 30분 타임은 광클릭을 해야 예약이 가능하다.
조금만 늦으면 바로 인원 마감으로 뜬다.
6인 기구 필라테스라 해도 운동 강도가 2인 보다 약하지 않다.
이 운동도 반복하다 보니 때론 반복되는 선생님의 구령 소리가 지루하기도 하고 거의 똑같은 동작인 것 같아 싫증도 나지만 밥 먹고 이 닦듯이 그냥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집에 열무김치가 떨어졌다.
아들이 열무김치 지겹다고 하지 말라고 한다.
냉장고를 보니 열무김치 하려고 어머님이 풀을 먼저 쒀 놓았다.
열무 한 단과 오이소박이를 해보려고 오이와 부추를 샀다.
집에 오니 벌써 11시다.
오후 한 시에는 수채 꽃방에 가야 한다.
오이소박이와 점심준비를 서두른다.
샤워할 틈도 없이 일단 오이소박이 레시피부터 찾는다.
나의 요리 앱은 “만개의 레시피”이다.
검색어에 오이소박이를 넣으니 다양한 레시피들이 올라와 있다.
제일 위에 놓인 레시피를 택한다.
오이에 굵은소금을 넣고 물이 나올 때까지 박박 문질러 비빈다.
메밀비비작작면은 살짝 비비면 되지만 오이 소박 이용 오이는 그야말로 박박 문질러 겉표면의 까칠한 것들을 말끔히 벗겨낸다.
어떤 의미의 작업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음 오이를 깨끗이 씻은 뒤 앞뒤를 조금 잘라내고 4등분 한 후 한쪽면에 십자를 넣어 소를 담을 수 있도록 한다.
그다음 소금에 뜨거운 물을 부어 그 물에 오이를 15분간 담가 놓는다.
오이에 간이 베이는 동안 속을 만들 양념을 준비한다.
양파, 당근, 부추를 적당히 썰고, 고춧가루, 멸치액젓, 물엿, 다진 마늘을 썩어준다.
다음 뜨거운 소금물에 담가 놓은 오이를 채에 받쳐 물기가 빠지도록 한다.
물기가 빠지는 동안 아침에 하지 못했던 일종의 숙제인 제육볶음을 준비한다.
제육볶음 레시피 역시 “만개의 레시피”에서 고른다.
다양한 종류의 제육볶음 레시피가 있다.
‘백종원의 대패삼겹살 제육볶음’을 골랐다.
물론 여기서 우리 집 레시피에는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전에는 고추장이랑 모든 양념을 고기랑 다 같이 넣어 썩어 두었다가 먹을 만큼 요리를 해 먹었었는데 이 레시피에서는 일단 고기를 먼저 굽는다.
삼겹살이 주재료지만 우리 집은 목살을 이용한다.
목살을 프라이팬에 굽는다.
거기에 설탕을 중간에 넣고 더 구워준다.
고기를 구우면서 설탕을 넣으면 고기를 좀 더 부드럽게 해준다고 한다.
여기에 대파를 넣고 다시 한번 구워준다.
대파 향도 고기에 베어 들어간다.
다음 물을 조금 넣고 고춧가루, 설탕, 간장, 다진 마늘이 들어간 양념장과 양파, 당근, 양배추를 같이 넣어 볶아준다.
고추장을 안 넣는 대신 페페론치노로 메운 맛을 낸다.
손으로 페페론치노를 만졌다가 모르고 손을 얼굴에 가져가거나 눈에 가져갔을 때 그 아린 맛이란.......
제육볶음이 만들어지는 동안 이제 오이에 부추와 당근이 들어간 속을 담기 시작한다.
정말 오랜만에 담근 오이소박이이다.
오이가 뜨거운 물에 약간 익혀지고 간이 잘 베여서 성공적인 맛이 된 것 같다.
제육볶음도 완성됐다.
제육볶음과 금방 담근 오이소박이와 함께 아들과 점심을 먹는다.
요즘 나의 주 고객은 큰 아들이다.
고추장이 안 들어간 제육볶음 아들의 맛 표현이다.
‘맛있↗↘네↗에’.
설거지를 마치고 시계를 본다.
벌써 한시다.
수채 꽃방은 한시부터 오픈된다.
오늘은 제대로 일찍 가서 그림을 그려보리라 마음먹었는데 오늘도 늦는다.
이제 열무김치 준비까지 끝내고 샤워를 한다.
냉장고에서 제주에서 주문한 오메기떡 대여섯 개 준비하고 부지런히 수채 꽃방으로 향한다.
두시 전에 도착해 그나마 다행이다.
수채 꽃방은 세종보 금강문화관에 있는 스터디 방이다.
동호회원들이 무료로 이용하는 공간이다.
대평동자치센터에 수채화 수업을 듣고 있는데 선생님이 이곳에서 그림 그리는 분들이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 그림을 그린다면서 추천해서 오게 되었다.
매주 수요일 한시부터 4시까지 연말까지 사용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일단 이 건물 이층에 가면 갤러리가 있어 전시 중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매주 전시작들이 바뀐다.
그리고 카페에서 내다보는 금강 풍경도 멋있다.
커피를 한잔 주문하고 스터디 룸에 들어가 그림을 그린다.
오늘은 나를 포함해 4명이다.
선생님은 종이접기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12시 반부터 오신 회원도 있다.
두시에 온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뭘 그릴까 망설인다.
지난번에 석류 스케치한 것에 색을 입힐까, 지난 주말에 부여 궁남지에서 찍은 연꽃 사진을 스케치할까 고민하다 후자를 택한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두 시간 동안 스케치를 하면서 작가 이야기며 또 사는 이야기며 온갖 수다들을 하고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에 돌아온 후 스케치한 곳에 색을 입혀보고 싶었다.
선생님은 초보자일수록 스케치를 여러 장 계속 연습하라고 하는데 나는 거꾸로 스케치는 대충하고 색칠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매일 물감을 칠하고 앉아있다.
아르쉐 종이를 많이 버리고 있다.
초보자여서 연습용 종이에 그려야 하는데 좋은 종이라니 무조건 사서 쓰고 있다.
경제적이지 않은 나의 한 면이다.
허기사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며칠 전에 또 그림을 그리는 언니와 톡을 주고받는데 수중발레를 그리는데 물 표현이 안된다면서 캔버스랑 물감 몇 개 샀더니 견적이 무려 25만 원 나와서 딸이 ‘돈 많이 든다고 엄마 미술 그만 배우라'라고 했다고 해서 ‘뭔 걱정이냐고 맘껏 즐기시라고’ 하며 같이 웃는다.
아르쉐 종이를 처음 샀을 때의 일화도 기억난다.
선생님이 좋은 종이라고 추천해 주었다.
아르쉐, 중목, 코튼 100%, 서울 간 김에 고속버스터미널 한가람 문구에서 그것도 두 권이나 10만 원 넘는 금액을 주고 샀다.
며칠 후 스케치북을 열어보니 검은색이지 뭔가.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봐도 다 검은색이다.
이를 어쩐담, 검은색 스케치북도 있단 말인가!
어떻게 검은색 종이에 그림을 그리지.
선생님이 분명 추천해준 종이를 샀는데 내가 잘못 골랐나 정말 불안했다.
환불받아야 되는데 구입한 지 며칠 지났고, 영수증은 버린 게 확실하고 여기는 세종이고 혼자 어떻게 해야 하나 검정 종이에 물감을 칠하면 색이 안 나올 텐데 하며 긴장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한참을 앉아서 이리 보고 저리보고 한참을 자세히 보니 그 검은색 종이는 보호용으로 제일 위에 있는 블록 지였다.
검정 종이를 떼어내고 나니 베이지 톤에 가까운 조금은 거친듯한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확인한 뒤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더라는.
이런 경험을 나 혼자 하나 싶었는데 어느 날 블로그를 여행하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분의 글을 읽으며 동병상련, 혼자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여간 수채화 초보자임에도 불구하고 연습용 종이가 아닌 프로들이 쓰는 종이에 과감하게 그리면서 실패작들을 마구 쌓아놓고 있다.
20장짜리 아르쉐 스케치북을 아낌없이 쓰는 바람에 이제 몇 장 남지 않은 것 같다.
연꽃에 한창 색칠을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전시회를 하고 있는 임동식 작가를 만나러 세종에 오는데 오는 김에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친구가 오면 온전히 하루를 내주어야 하는데 잠시 고민은 했지만 오롯이 하루를 친구와 함께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친구가 잘 아는 작가가 세종에서 특별전을 한다면서 작가도 만날 겸 세종에 한번 오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세종시 출범 10주년을 맞아 2020년에 박수근 미술상을 받은 작가인 ‘임동식 동방 소년 귀환기 방축리 풍경전’이 박연 문화관에서 한 달간 전시되고 있다. 7월 3일이 전시 마지막 날이다 보니 작가도 바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날을 잡았다고 했다. 그래 잘됐다 싶었다. 그림도 보고 또 작가도 만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지. 친구가 오면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일정을 생각해 봤다. 11시에 작가와 약속했다고 하니 같이 전시장 가서 전시 보고 점심 먹고 국립 세종수목원을 산책하면 좋을 것 같다. 날씨가 너무 뜨겁지는 않아야 할 텐데. 시간 되면 나는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대통령 기록관도 좋다고 하는데 그곳까지 한번 가볼까 한다. 그리고 내가 수채화 그리러 가는 금강문화관 카페는 꼭 들러 금강 뷰를 보면서 찬 한잔 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하루 특별한 일정이 없어 나에게는 무척이나 자유스러운 날,
돌아보니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이런 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내가 정하는 일에 따라 시간이 따라오는 날이었다.
내일은 대평동자치센터에서 진행하는 캘리그래피 마지막 날,
액자에 넣을 글씨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오늘 연습을 좀 할까 했는데 그냥 내일로 미룬다.
내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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