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안이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런 요구를 충족시켜줄 방송사는 어디에도 없다.’고 전하세요.”
팀장은 화를 내며 질의서 용지를 쓰리기통에 구겨 던졌다. 내 기획안도 쓰리기통으로 함께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유선 상으로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일단 직접 만나서 설득을 해보겠습니다.”
나는 기획안을 성사시킬 마음이 간절한 상황이었다.
매년 12월이면 그 다음 해에 제작될 특집 프로그램이 결정되고 담당PD와 함께 대략 예산도 배정된다. 기획안이 다 채택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예산이 많이 소요되는 해외 취재물의 경우는 더더욱 채택될 확률이 낮다. 가끔은 예산을 다음해로 남기지 않으려고 연말이 다가오면 선심을 쓰는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수정을 거듭하긴 하지만 첫 번째 배정되는 예산은 달콤한 사탕이 아닌 짜디짠 소금이다.
<탈북청년 비틀즈를 만나다> 기획안은 해외 취재물로 동행인을 포함한 예산으로 배정해 주도록 요청한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기획안은 채택되었지만 배정된 예산은 고작 프로듀서 한명이 해외 취재를 다녀올 예산밖에 되지 않았다. 프로그램 기획의도를 살리려면 당연 탈북청년이라는 동행인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런 적은 예산으로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것이지? 차라리 채택을 하지 말 것이지’ 라고 하면서 혼자 화를 삼켰다. 그래도 이 기획안을 완성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어쩌면 해외 취재가 흔하지도 않을 상황에서 해외 취재를 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7월 방송계획을 세우고 5월경에 영국 취재를 다녀와야 하는데 예산 고민에 빠졌다. ‘나 혼자 비틀즈를 취재하고 방송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떤 방식으로든 탈북청년이 동행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매일매일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봤다. ‘영국으로도 탈북자들이 많이 간다는데 영국에 있는 탈북청년을 섭외해서 동행할까? 그래도 그 청년에게 출연사례는 해줘야 하는데 그 비용은 어떻게 짜내지…….’
궁하면 통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고민 끝에 통일부에 기획안을 던져보기로 했다. 통일부에 북한이탈주민들의 담당부서인 정착지원과에 연락을 취하고 메일로 기획안을 보냈다. ‘탈북청년 한명과 음악해설을 맡아줄 전문가를 영국취재에 동행해 갈 수 있는 예산을 지원해 주십사’하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요청하는 김에 되든 안 되든 통 크게 요청을 해야 하는데 정직하게 딱 두 명에 대한 서울과 런던을 오가는 왕복항공권과 열흘 동안의 체재비 일천만원 정도를 요청했다.
기획안을 검토한 담당자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얼씨구. 통일부가 위치한 광화문에서 우리 쪽에서는 팀장과 나, 그리고 작가가 나갔고, 통일부에서는 담당과장과 실무자가 나왔다. 만남은 즐거웠다. 우리가 하는 일이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이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합이 되는 측면들이 많았다. 만남 후 연락이 왔다. 통일부는 예산을 직접 집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지원 재단(현 ‘하나재단’)으로 넘겨주었다.
그때 재단에서 바로 예산을 지원해 주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재단 담당자가 메일 하나를 보내왔다. 하나의 장벽이 걷히니 또 다른 장벽이 놓인 셈이었다. 질의서 내용은 예산을 지원했을 시 이러저러한 것들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지 한 10개 정도에 달하는 질의서였고 그에 대한 답을 원했다. 이를 팀장한테 보고했더니 팀장은 ‘이런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송사는 어디에도 없다’면서 그 용지를 쓰리게 통에 구겨 던지면서 기획안을 접으라고 말했다. 나 역시도 처음 그 질의서를 받았을 때 ‘도대체 방송을 안 하면 안했지 이런 질의에 답변까지 하면서 지원을 받아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일었다. 그래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팀장한테 ‘직접 한번 만나서 기획안 설명을 해보겠다.’고 하고 재단 관계자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근처 나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을 택해 점심을 예약하고 관련부서 책임자와 실무담당자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작가와 나는 기획안을 열심히 설명 드렸다.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북한에서 온 청년들이 민주주의 나라인 영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비행기 역시 그들은 한국으로 올 때 처음 타봤다.)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비틀즈를 체험하는 것을 방송으로 내보낼 것이고 텔레비전으로도 방송된다.’ 또한 ‘방송 보도 자료를 배포하면 재단의 탈북인 정착지원 사업에 대한 홍보효과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단에서 요구했던 10개의 질의서에 대한 대답을 서면이 아닌 구도로 하는 현장이었다. 결국 탈북청년들의 영국 비틀즈 체험기를 그들이 발행하는 계간지에도 기고하기로 하고 예산 지원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탈북청년 한명이 아닌 세명까지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간절했던 예산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나는 그때의 기쁨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건 아마도 시작점을 찍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외부에서 예산을 협찬 받는 과정을 겪어본 후 나는 ‘사서 고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며 그 후로는 주어진 예산 범위 안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되었다. <탈북청년 비틀즈를 만나다>가 나에게 외부 협찬을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프로그램이었다.
글을 쓰면서 메일함을 찾아보니 받은 편지함은 다 삭제되었는데 보낸 편지함에 그때 보냈던 메일이 남아 있다. 한번 꺼내 읽어본다.
제목: KBS한민족방송 특별기획 탈북청년 비틀즈를 만나다. 예산지원관련입니다.
2013-03-25 17:32:40
KBS라디오 1국 한민족방송 오순화 프로듀서입니다.
탈북인들과 북한주민들을 위한 특집 및 일반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고 있구요,
현재는 "지금은 탈북인 시대"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올해 저희 한민족방송에서 특별기획으로 3부작 프로그램인 "탈북청년! 비틀즈를 만나다"를 준비 중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북한에서 팝송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탈북청년이 하나원 교육 중에 비틀즈의 "Hey Jude_헤이쥬드"를 들으면서 위안을 받았다는 고백에서 출발합니다.
탈북청년이 팝의 본고장인 영국현지로 직접 가서 비틀즈를 체험하며 팝송 속에 들어있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의 가치에 대해 되새겨 보는 의미의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올해 KBS예산이 워낙 열악해서 제작진의 프로그램 제작비용밖에 책정이 되지 않아
원래의 기획취지를 충분히 살리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통일부의 예산협찬지원을 요청 드리고자 메일을 드립니다.
저희가 통일부에 지원요청예산은 총 천만 원입니다.
탈북청년과 팝송전문가 등 2인에 대한 왕복항공권과 8박 10일간 체제에 따른 숙박비로 일인당 5백만 원 정도 소요되네요…….
방송은 7월 1일(월)부터 3일까지 60분물 3부작으로 제작예정이구요,
영국현지는 5월 하순에 취재예정입니다.
KBS에서 탈북인의 남한정착과 문화적인 차원에서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기 위해 추진하는 프로그램에 통일부의 예산협찬을 바라며
이번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더 좋은 프로그램들을 같이 추진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프로그램 기획서입니다……. 검토해주시구요.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의 연락처는 오순화 (000 0000 0000)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절실했는지 절절한 내용이다.
그때의 열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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