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어떤 것의 끝을 본다는 것은 여러 지표가 맞아야 한다. 어떤 것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봐야 하고, 계속 보기 위한 여러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시대를 잘 타야 하고, 주변에 아군이 있어야 한다. 결코 혼자만의 열정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것의 끝을 본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축구의 끝을 본 메시, 비즈니스의 끝을 본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투자의 끝을 본 워런 버핏 등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들고, 읽는다.
그런데 철학은 현재 시대의 끝을 본 사람과는 또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소프트웨어 관점에서 말하자면, 메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워런 버핏 등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레임워크랄까? 보다 인류를 유용하게, 즐겁게 하는 솔루션이랄까? 철학은 더욱 본질적인 것에 가깝다. 마치 <정보 이론>을 만든 클로드 섀넌을 보는 것 같달까?
그동안 내가 철학을 가까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 '파르메니데스'와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서를 읽으면 파르메니데스 챕터처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이해가 되면 철학이 아닌 것 같은... 그게 철학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처음 들어본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내 철학에 관한 정의에 명쾌한 답을 줬다. 하나도 이해 못 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데, 서양인 사고의 한계를 논한다.
"서양어 'is'의 세 가지 용법을 구분해서 말할게요. 첫 번째는 술어적 용법입니다. 두 번째로 존재적 용법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에게 낯선데 희랍인에게는 친숙한, 진리적 용법입니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서양인들은 'is'라는 말을 쓸 때 이 세 가지 뜻을 모두 한꺼번에 생각한다는 거죠. 이게 중요합니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이 세 의미가 뒤섞인 용법이 나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누군가 만들었을 테고, 누군가는 언어의 본질에 관해 고민했을 것이다. 언어의 쓰임과 현실 세계와의 간극에 관해 생각했을 것이고, 쉽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것의 끝을 보는 것은 결코 혼자만의 열정과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철학은 그런 관점에서 내게 온전한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철학을 공부하며 어떤 것을 취해야 할까? 취하고 있을까? <생각의 싸움> 책 절반을 넘어서는 이 시점에 말하자면, 전혀 다른 관점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새로움에서 에너지를 얻고, 방향성을 찾는다. 새로움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논한다. 내게 철학은 새로움이다. 그동안 생각지 못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내게 에너지요, 방향성이요, 과거요, 미래다.
"분명한 건, 없는 건 없다고 얘기할 수 없지만 있는 건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있는 건 있으니까. 존재의 특성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는 사례가 분명히 있으니까."
분명한 건 철학에서 취할 것은 있다.
생각의 싸움 종합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