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일정은 이랬던 것 같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 어색하게 다른 유학생들과 접선, 수상해 보이는 봉고에 탑승, 시드니로 진입.
ABN, 은행 카드, 휴대폰 개통.
ABN수속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학원에서 바로 신청한 거 같다.
은행 카드는 유학원 근처에 Commonwealth 메인 브랜치가 있기에 그곳에서 만들고
휴대폰은 당시에는 존재했던 3 모바일 (지금은 Vodafone으로 통합). 역시 유학원 근처에서 개통. 첫 달은 호스트 패밀리 집에서 지냈다. 시드니 메인 CBD에서 버스로 40여분 거리에 있는 Leichhardt. 집 앞에 버스 종점이 있었다.
호주 생활은 즐거웠다. 가지고 온 돈이 있었기에 어학원을 마치고 관광 - 걸어서 동내 구경 -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은행 잔고가 바닥을 쳤다. 1000원 = 1불로 화폐 단위가 바뀜에 따라 사라진 금전 감각은 덤. 너무 멀어 호스트 집에서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시티 쪽에 셰어 하우스를 찾고,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과 거리를 멀리하고, 한인 Job을 찾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호주에 왔기에, 한식당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Seek.com과 같은 온라인 구인포탈의 존재를 몰랐기에 직접 찾아다니며 이력서를 돌렸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아도 현실은 잔혹하다. 이력서에 쓸 경력도 없을뿐더러 이력서 양식마저 다르니까. 호주 이력서에는 사진을 넣을 필요가 없지만 지금도 해외에서 온 사람들의 이력서에 사진이 붙어있다. 10여 년 전 호주 내 경력이 전무한 나는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경력이 전무한 경우, 온라인 구인 포탈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10년도 넘은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충은 이렇다.
이력서를 돌리러 가기 전날 편한 백팩이 없다면 맘에 드는 거 하나 사고, 키친 핸드 3 신기인 주방화 (나의 경우는 Crocs Bistro) / 검은색 상의 무지 티 혹은 폴로 / 주방용 바지를 구입하는 걸 추천한다. 이 3종 세트를 구입하라는 이유는 주방에서 일하게 되면 필요한 물품이기도 하지만, 원하면 지금 트라이얼 - 시험 삼아 일하는 것 - 할 수 있다고 하기 위해서이다. 언어도 경력도 없을 때 우리는 틈새 - 당일 키친핸드가 캔슬했다던가, 큰 예약이 잡혀 손이 부족하다던가 등- 를 공략해서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상의가 검은색인 이유는 땀을 흘리거나 물이 튀어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주방 바지는 안전성의 문제도 있지만 체크 바지의 경우에 더러움이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며, 통풍이 잘 된다. Crocs Bistro를 추천하는 이유는 신뢰성 있는 주방화 중 가격이 저렴하며 가죽으로 된 주방화에 비해 가볍고 쿠션이 좋아 발에 피로가 덜하다. 개인적으로 발의 볼이 넓어서 가죽제품의 경우 사이즈 정하기가 애매한데 Crocs Bistro의 경우엔 볼도 넓게 나와 안성맞춤이다. 내구도도 나쁘진 않다. 가죽의 경우 인솔과 맞닿은 옆부분이 뜯어지지만 크록스의 경우 밑창이 다 닳거나 접착제가 떨어진 적이 한번 있지만 평균 수명은 가죽 신발보다 길다고 장담한다. 크록스 비스트로는 할인하면 두세 개씩 쟁여둘 정도로 꾸준히 애용 중이다.
트라이얼의 경우 짧게는 2~4시간/하프데이 정도로 진행되었고 쿡 페이라도 쳐 주는 곳, 차비 정도의 일정 금액을 주는 곳도 있지만 보통은 주지 않았다. 지금은 적당히 캐시로 봉투에 넣어 준다. 큰 호텔 그룹이나 호스피탈리티 그룹처럼 정확히 정해진 법률에 따라 일을 하는 곳은 트라이얼 중 부상에 따른 보험의 복잡성 등을 이유로 트라이얼을 받지 않았으며 이력서도 Seek.com이나 그룹 홈페이지에서 따로 구인 구직을 하기에 직접 방문 방식으로는 일을 구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개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목표로 삼는 수밖에 없다.
시드니의 경우 Surry hills 쪽이 개인 운영 레스토랑이 많다. Tripadvisor 같은 레스토랑 정보 사이트를 Surry hills 쪽으로 잡고 그곳에 있는 레스토랑의 위치를 파악해서 이력서를 돌리러 가는 편이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추천하는 시간대는 2시에서 4시 사이이다. 보통 런치 서비스를 끝내고 디너 서비스를 준비하거나, 파인 다이닝의 경우 디너 서비스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통적인 브레이크/주방 클로즈 시간을 꼽자면 2시에서 4시이다.
서비스 시간대에는 전달한 이력서가 전달될 확률도, 이력서를 읽어 볼 확률도 떨어진다. 일하느라 바쁜데 이력서가 건네어지면 대부분 바로 휴지통으로 직행하거나 선반 뒤쪽에 구겨져 다음 대청소 때나 발견될 확률이 높다. 대면해서 전하면 조금이라도 나의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영업하듯, 웃으면서 자신감을 내 비추면서 수줍게 이력서를 전달하는 것이다.
본인은 이력서(CV/Resume)를 거의 50장 가까이 출력한 후 가방에 놓고는 첫째 날은 Surry hills 지역, 둘째 날은 Central Station부터 CBD 절반까지 그리고 삼 일째 되는 날은 나머지 CBD와 Circular Quay 지역을 돌았다. 푸드코트/패스트푸드 제외, 본인이 생각하기에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레스토랑 위주로 이력서를 넣었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막막했다.
내성적이진 않지만 외향적이지도 않았다. 영어도 못하고, 경력도 없으니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다고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어가며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근처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며 주저했지만 첫 이력서를 넣은 후 10장 정도 돌리니 들어가서 기계적으로 이력서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이란 레스토랑은 다 들어가 이력서를 전달했다. 들어가 간단한 소개 후, 일을 구하러 왔다 이야기한 후 카운터의 웨이트리스/ 웨이터/ 매니저에게/ 주방의 셰프에게 이력서를 전달했다. 연락 달라는 말과 인사와 함께. 그렇게 이틀이 지나갔다. 100여 장의 이력서를 돌리고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첫날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찬 느낌이라도 있었는데 둘째 날부터 지치기도 했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듯한 소외감도 들었다. 입장 바꾸어 보면 한국에서 한국어도 하지 못하는 피부 색도 다른 "외국인 노동자"에게 구직이 될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
셋째 날은 날씨까지 흐렸다. Town hall station부터 걸어가며 이력서를 돌리고 Circular Quay에 도착하니 비까지 조금씩 내렸다. 오페라 하우스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노란 조명이 켜진 레스토랑 몇 개가 있었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오페라 하우스로 걸어갔다. 보슬비를 맞으며 우울한 경치를 보고는 한층 더 우울해졌다. 오페라 하우스를 내려와 그냥 집에 가자 생각한 차에 아까 지나쳤던 레스토랑이 보였다. 셰프가 셔츠를 입은 누군가와 카운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가서 이력서를 전달했다. 셰프와 인사를 하고 이력서를 전달하자, 셰프는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고 다 읽고 난 후 나에게 내일 나올 수 있냐고 물어봤다. 가능하다 이야기하였고 호주에서 첫 주방 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