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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우리 Jul 01. 2023

개박사 리포트-1

겁쟁이의 응가루틴과 항문낭염

가을만 되면 사고치 던 까망이는 지난해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퇴근 후 산책을 나갔는데 뭐가 불편한지 밖에서 똥꼬스키를 타는 까망이. 응가가 깔끔하게 안 나와서 찝찝함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집에 돌아와 씻기며 보니 똥꼬 한쪽이 부어있었다. 놀란 마음에 일단 사진 찍고 근처 24시간 하는 병원으로 둘러업고 달려갔다. 병명은 항문낭염.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항문낭이 뭔지 잘 알 것이다. 항문낭은 강아지 고유의 분비물이 담겨있는 주머니로 항문 양쪽에 위치해 있다. 이 분비물은 배변할 때 특유의 냄새(쇠 냄새 또는 짙은 비린내)와 함께 배출되는데 이를 통해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고 이 냄새로 상대를 식별하기도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람과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실내 생활이 늘고 실외 배변 활동이 줄어들면서 견주가 주기적으로 짜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옥구와 망구도 씻기면서 가끔 항문낭 짜기를 시도했지만 거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실외배변을 자주 하니 그때 잘 배출된다 생각하고 살았다. 항문낭염은 분비물이 제 때 배출되지 않으면서 항문낭에 염증이 생기고 심하면 항문낭이 내부 또는 외부로 터지게 되는 질병이다.

까망이는 한쪽이 하루 이틀 안에 터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일단 당일 수술이 불가능하니 하루 입원 후 다음날 수술로 양쪽낭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다음날 수술 중 확인해 보니 하루 사이에 심한 쪽이 안쪽으로 터져버렸고 퍼져버린 분비물을 어렵게 제거하면서 성공적으로 수술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괄약근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지 응가할 때마다 힘들어했지만 수술부위도 잘 아물고 이제 항문낭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왼쪽위) 수술 전, (오른쪽위) 수술 2일 후, (아래) 수술 2주 후

수술 부위가 덧나지 않게 건들지 않고 잘 버텨준 까망이가 고마우면서도 왜 까망이는 항문낭 배출을 잘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겁 많고 소심한 까망이의 성격이 결국 항문낭염으로 이어진 것이라 결론지었다. 산책 시 까망이의 응가루틴은 매우 독특하다.


1. 산책 중 갑자기 피치를 올리고 빠르게 걷는다.

2. 사방이 확 트인 공간을 찾아간다.

3. 원하는 자리가 나타나면 갑자기 앉아 배변한다.

4. 배변하며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5. 배변 후 빠르게 자리를 피한다.


가장 특이한 건 빠르게 걸으며 응가를 예열해서 찾아낸 장소가 탁 트인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냥 도로도 아니고 사방이 완전히 트인 공간(예를 들어 횡단보도 한가운데)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배변할 때를 외부 위협으로 부터 방어하기 가장 취약한 순간으로 여긴다고 한다. 겁 많고 경계가 심한 까망인 배변 중에도 언제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트인 공간을 선택하는 것 같다. 배변하는 중에도 사주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배변 후 절대 뒷발차기를 하여 냄새를 퍼뜨리는 일이 없다. 까망이의 동배 자매견 아름이도 까망이처럼 경계가 심하지만 자신감 있게 볼일 본 후 시원하게 뒷발차기를 하며 영역표시에 망설임이 없다. 절대 넓은 공간에서 하지 않고 풀이나 흙 위에 다른 강아지가 배변했던 곳을 선호하는데 영옥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름이의 시원한 응가 시간

추측이지만, 아름이와 비교하면 골격도 작고 소심한 까망인 형제, 자매들 중 막내일 것이다. 길거리 무리들 중에도 약한 아이라 생활이 쉽지 않았을 거고 구조 후 사람과 함께 살면서 영역표시는 더욱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분비물이 쌓여 결국 항문낭염으로 발전한 게 아닐까. 실제로 항문낭염으로 고생한 지인의 반려견도 매우 겁 많고 소심한 아이라고 한다. 어디까지나 까망이의 행동 패턴에서 나온 추측일 뿐 전문적인 지식은 아니다. 다만 까망이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조금 더 자신 있고 편안한, 그리고 건강한 생활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만 가득할 뿐이다.

에어컨 소리가 무서워서 영옥이 옆으로 간 까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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